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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말씀요약] 2009년 1월-6월 설교요약 조회수 : 1244
  성경본문 :  설교일 : 2014-01-05
  설교자 : 김성진목사
  첨부파일:   2009설교요약-1.hwp(95K)

~ 2009. 6. 28.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제   목 :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성경말씀 : 이사야 1 : 18 ~ 20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그 시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고 오늘날 모든 인생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사실 하나님과 우리 인생들은 변론을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완전무결하심에 비하여 인생들은
너무도 추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시므로
우리 인생들의 격을 높이셔서 친히 변론하자고 말씀하신다.
죄송스러우면서도 너무도 고맙고 감사한 말씀이다.
   하나님과 무엇을 변론할까?
우리 인생의 삶에 필요한 모든 문제를 전반적으로 다 변론
할 수 있으나 오늘 말씀에서는 3가지로 한정하셨다.

첫째, 인생이 죄가 있느냐? 없느냐?
   죄가 있느냐? 없느냐? 를 논하기 전에
먼저 "죄"란 무엇인가를 확실히 해야 한다.
"하나님과 그 말씀을 거역하거나 순종함에 부족한 것"을
죄라고 정의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며
천하 만물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운영주체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불순종하는 것이 곧 죄인인 것이다.
   자, 인생들이 죄가 있는가?  없는가?
허심탄회하게 변론하고 변호해보라.
또 자기 자신은 죄가 있는가? 없는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악을 떠나 의를 행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성경 로마서 3장에 말씀하고 있다.
   십계명으로만 살펴본다하여도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신으로 인정하거나 섬기는 것이 죄며
주일 (안식)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지 못함도 죄이며
부모를 공경하지 못한 것도 죄이며 미워하는 것도 곧 살인 죄
에 해당한다.  실제로 간음은 말할 것도 없고 부부 외의 남녀
간에 음심을 품은 것도 죄이다.
   도둑질, 거짓말, 탐심 등이 다 죄이며
성경 66권 말씀을 불신하고 순종치 않는 것이 다 죄이다.
이러므로 창세 이래로 모든 인생들은 다 죄인이다.

둘째, 죄에 징벌이 있느냐? 없느냐?
   천하만사 만물의 이치가 모두 다
심은 대로 거두고 행한 대로 받게 되어 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의 모든 언행심사와 죄에는 그에 따르는 합당한
징벌이 따른다.   때로는 죄가 들어나 법망에 걸려 교도소에서
그 죄 값을 치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의
사회적 법에 따른 처벌이며 징벌의 일부분일 뿐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는 히브리서 9장에 말씀대로
모든 인생들은 죽음과 더불어 그 전 생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훨~ 훨~ 타오르는 지옥 불바다에서
그 죄의 경중에 따라 형벌을 받게 되어 있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무서워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사죄의 길이 있냐? 없냐?
   모든 인생은 죄가 있고 그 죄에 징벌이 따른다면
과연 그 지옥 형벌을 다 받아야만 하는가? 그 형벌에서
사함 받고 구원 받을 길은 없는가?
   구원 받을 길이 있다.
그렇기에 오늘 말씀에서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아들 예수님께서 인생들의 죄 값을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 죄 값을 다 담당하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셨다  이 사실을 그대로 믿고 예수님을 구주(救主)로
섬기면,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천국복락을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인생이 사죄 받고 영생을 얻을 길이 분명히 있다.
 
   이제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은 인생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야 한다.
   이미 믿은 인생들은
하나님과 그 말씀인 성경을 신임하여 즐거움으로 순종하라.
하늘에 신령한 축복과 땅의 기름진 것으로 충만하게 된다.

2009. 6. 21. 믿음을 더하는 비결
 


제      목 : 믿음을 더하는 비결
성경말씀 : 누가복음 17 : 5 ~ 10

   사도들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사람들 중에서 믿음의 최고봉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믿음에 자만하지 아니하고
예수님께 나아와서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소서" 하고 간청을 했다.
이에 예수님께서 믿음을 더할 수 있는 비결을 세 가지로
말씀하여 주신 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이다.

  < 믿음을 더할 수 있는 비결>
첫째, 순종하는 믿음이 되어라.(5~6절)
   사도들의 믿음을 더하여 달라는 청원에
예수님께서는 의외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말씀하셨다.
   겨자씨는 여러 씨앗 중에 아주 작은 씨앗으로 참깨 씨의
5/1 정도 되는 크기이다.  그렇게 작은 씨이지만
생명이 있어서 땅에다 심으면 싹이 나고 잎이 나서 1년에
3~5m나 자라나는 무성한 식물이다.
   즉, 겨자씨처럼 작은 믿음이라 해도 생명이 있는 것은,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자라나서 믿음이 더하여 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명이 있고 산 믿음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야고보서 2:26절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하셨
으니, 이 말씀은 곧 행함이 있는 믿음은 산 믿음이요 생명이
있는 믿음이라는 뜻이다.
   겨자씨처럼 작은 믿음이라 하여도 살아있는 믿음,
즉 말씀대로 순종하는 믿음은 산 믿음이고 산 믿음은 자라
나서 믿음이 커지고 더하여 진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말씀을 순종하는데서 일어난다.
말씀을 받고 들었어도 순종하지 않을 때, 행함이 없을 때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아니 하신다.
   그때그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으니 신앙의 체험을
하게 되고 신앙의 체험을 하게 되니까, 아 하! 하고 믿음이
더해지고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
   어떤 분들은 "자신은 5년 10년 동안 교회를 다녔는데도
도무지 믿음이 약하고 자라나지를 않는다"고 푸념한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  그 원인은 간단하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 말씀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을 받은 대로 순종해보라!
순종하면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고 그 역사를 체험하고 보면
믿음이 확실해지고 더하여지고 강해지게 되는 것이다.

둘째, 성실한 믿음이 되어라.(7~9절)
   세상일에도 성실하지 않은 사람은 잘 될 수가 없다.
양을 치던지 밭을 갈던지 맡은 일을 성실히 감당하는 사람,
주인의 뜻을 잘 받들어 수종드는 사람이 잘 된다.
   믿음도 마찬 가지다.
예배를 드리며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섬기고 수종드는 일 등
교회에서 맡은바 자기 사명을 성실히 감당할 때에 믿음이
커지고 자라나게 된다.
   게으름을 부리고 성실하지 못하면 은혜를 받을 수 없고
은혜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도 자라나지를 않게 된다.

셋째, 겸손하게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라.(10절)
   말씀에 순종하고 성실하게 믿음의 길을 걸어가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축복하셔서 범사가 형통하게 된다.
   이때에 자기가 잘해서 잘 된 것처럼 자기 자신을 뽐내거나
자기가 영광을 취해서는 안 된다.
"무익한 종이라 마땅히 할 일을 한 것입니다"하고 영광과
찬송을 하나님께 돌릴 때, 그런 사람에게 믿음을 더하시고
축복하여 주신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믿음이 자라나지 않고는 신령한 축복을 받을 수가 없다.
   사도들은 오늘날 우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더하여
지기를 간구했으니, 오늘날 우리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도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믿음에 믿음이 더하도록
분발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을 받아서 순종하고,
삶에 분주함 속에서도 믿음에 성실하고, 이루어진 모든 일에
영광을 성삼위 하나님께 돌리며 겸손한 믿음으로 살면
우리 믿음은 더욱 아름답게 자라나고 축복을 누리게 된다.

2009. 6. 14. 에벤에셀
 
제     목 : 에벤에셀
성경말씀 : 사무엘상 7 : 7 ~ 14

    지금부터 약 3,000 년 전,
   사무엘이 이스라엘 나라를 인도할 때이다.
백성들이 믿음에서 타락하고 방종하여 우상을 섬기며 범죄
하므로, 사무엘이 "미스바" 라는 곳으로 백성들을 불러 모아
회개를 촉구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권고했다.

   이에 백성들이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데,
이런 소식을 들은 팔레스타인 족속들이 대군을 이끌고 침략
하여 이스라엘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근심 걱정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을 추슬러서
1) 사무엘 선지자를 찾아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요청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삶은 현실에서 당하는 크고
   작은 어려운 일들, 우리 힘으로 감당치 못한다고 좌절할
   것 없다.  하나님의 종을 찾아 의논하고 기도 요청을 하라.
2) 사무엘이 어린 양으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고 기도했다
   번제란 양이나 소 제물들을 통째로 불살라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이 제물처럼 통째로 불사름을 당해야
   마땅한데 저를 대신하여 드리니 받아 주시옵소서. 함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을 믿는 믿음에서이다.
   기도의 결과, 하나님께서
   사무엘과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하셔서 뇌성병력을
   발하시니, 팔레스타인 군대가 혼미 백산 하여 패하게 되고
   이스라엘은 대승을 거두었다.

   사무엘 선지자가 큰 돌을 하나 취하여 세우고
"에벤에셀"이라 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
는 뜻이었다.  또 "에벤에셀"에는 더 깊은 뜻이 있으니,
첫째, 하나님 은혜를 깨닫고 감사 찬송한 것이다.
   자기로서는 감당 못할 어려운 일을 만났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잘 될 줄 믿고 하나님의 종과 함께
기도했다. 믿음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만능으로
도우셔서 어렵고 힘든 일들이 잘 해결이 되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잘 된 것을 잊어버리고 우연으로 생각
하거나 자기의 노력으로 된 줄 알고 스스로 으스댄다.
   그러나 사무엘은
잘되어진 모든 일이, 적과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것이,
오직 하나님의 도우신 은혜임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송하는 뜻에서 돌을 세우고
"에벤에셀"이라 이름 한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함이다.
   문자나 기록할 수 있는 것이 갖춰지지 못한 그 시대에
풍습은, 어떤 사실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서 돌를 취해
세워서 증거로 삼고 기억하고자 했다.
   따라서 "에벤에셀"은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뜻만이 아니고
"도와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라는 강력한 뜻에 의해서였다.

셋째, 앞으로도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믿음에서다.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도아주심을
믿습니다. 여기까지만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히 함께 하시며
도와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는 믿음에서 "에벤에셀"인 것이다.
   생각해 보라!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께서 내일은 도와주시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에벤에셀"은 앞으로 어떤 일들을 당해도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모든 것을 감당하여 승리하겠
다는믿음의 결의인 것이다.

   우리도 삶을 돌아다보면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님 크신 은혜라~♪~♪~
찬송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도 돌을 취하여 세우고 "에벤에셀"이라
이름 붙이고 성삼위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려야 한다.
   어디에다 세우느냐?
우리 마음속에 세워야 한다.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께 감사 찬송하며
도우신 하나님 은혜를 잊지 않고 항상 기억하며
앞으로도 영원토록 함께 하시며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천성을 향해 담대하게 전진해 나가는 것이다

 
 
2009. 6. 7.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제     목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성경말씀 : 빌립보서 2 : 5 ~ 11

   사람은 누구에게서 배우고
누구를 본받아 사느냐에 따라서 축복받는 훌륭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형편없는 불행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훌륭한 스승에게서 배우고 그의
가르침을 받으려고 동분서주하며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고
많은 비용을 지불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 예수님처럼 전지전능하며 완전무결하고
영원불변하여 믿고 따라야 할 분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하시며,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배우라고 명령을 하셨다.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것인가?>
첫째, 동등 됨을 취하지 않으심이다.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형상이요 본체
로서 아버지 하나님과 100% 꼭 같으신 전지전능 완전무결
영원불변하신 분이다.  그러함에도 동등 됨을 취하지 않고
하늘 영광 권세 다 내놓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셨다.
   우리가 삶에서 분노하고 고통당하며 시험에 드는 원인이
"나를 다른 사람과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시당했다. 소외당했다. 내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결정했다.
자기 맘대로만 한다.  등등의 내용은 결국 자기 자신을 동등
하거나 동등 이상의 대우를 해 주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님 마음을 품어서
주위 사람과 동등 됨을 취하지 말고 내려앉으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자기비하나 하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뭐 하나 부족함이 없이 동등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예수님을 본받아 영원한 상급과 축복을 위해 내려앉는 것이다.

둘째,  자기를 비워 종이 되심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않음에서
더 자기를 낮추시고 자기를 비워서 종의 삶을 사셨다.
  하나님을 섬기며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된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않고 내려앉으셨어도
천하 만물 위에 뛰어나신 존귀 영광 권세가 있으신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비워 종이 되신 것이다.
  우리도 주위 사람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이기주의를 버리고 자신을 비워 성삼위 하나님을 섬기며
주변 사람들을 섬기는 종의 길을  가야 한다.

셋째, 겸손히 낮아지심이다.
   동등 됨을 취하지 않고, 자기를 비워 종이 되셨고, 이에서
더 낮아져서 온유하고 겸손한 지순의 삶을 사신 것이다.
  즉 동등 됨을 취하지 않고 종이 된 자신의 삶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고, 부끄럽지도 않으며, 억울하지도 않고,
오히려 자기의 사명임을 알고 감사하며 감당하신 것이다.
  자기의 낮아져서 종이 되어 섬기는 삶이, 불편하거나
부끄럽게 또는 억울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낮아진 것이 아니다.
진정 낮아진 사람은 자기의 낮아짐까지도 감사하는 사람이다.

넷째, 죽기까지 순종하심이다.
   참으로 낮아져서 섬기는 사람은 자신의 목숨보다도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더 존귀히 여겨 기뻐 감당하며
사람들을 사랑하여 자신을 희생함도 기꺼이 하게 된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미 이 길을 걸으셨고 승리를 하셨으며
우리에게도 본받아 따라 오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낮아지신 결과>
첫째, 천상천하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최고의 이름을 얻었다.
둘째, 하늘과 땅, 땅 아래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예수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굴복했다.
셋째, 모든 입으로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며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했다.

   사람들이 낮아지지 못하고 섬기는 삶을 못사는 원인은,
동등 됨을 취하지 않고 자기를 비워서 종의 삶을 살아가면,
자기만 손해 보고 자기만 바보 천치가 되며 억울하게 되는 것
으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라!
하나님께서 높여주고 알아 주셔서 천상천하에 최고(最高)가
되신 것이다.  우리도 낮아지면 이렇게 높여 주신다.


2009. 5. 31. 너로 인하여 복을 받았다.
 
제    목 : 너로 인하여 복을 받았다.
성경말씀 : 창세기 30 : 25 ~ 30
 
   본문말씀의 배경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에 관한 말씀이다.

   야곱이 혈혈단신으로 고향을 떠나 머나먼 아람나라
외삼촌의 집에서 거의 20 여 년 동안 머슴살이를 하다가
이제는 아들 열하나에 딸 하나를 낳아 일가를 이루고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외삼촌이자 장인인 "라반"과
의논을 한다.
   그 대화중에 라반이 야곱에게
"여호와께서 너로 인하여 내게 복을 주셨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라반은 주인이고 야곱은 일꾼인데 주인 라반이
일꾼 야곱에게 "너 때문에 복을 받았다"고 칭찬한 것이다.
   이에 야곱은 "하나님께서 나의 공력을 따라 복을 주셨다"
고 대답하였다. 즉 하나님께서 라반에게 복을 주셨는데
그냥 주신 것이 아니고 야곱의 수고와 분투노력한 것을
통해서 복을 주셨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하다. 신앙적으로나 일반적으로 게으름을 부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다.

  야곱이 분투노력한 공력을 살펴보면,
 <신앙적인 공력>
첫째, 하나님을 잘 섬겼다.
   야곱은 수천수만 마리의 양을 치는 목자이다.
분주해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틈을내기가 아주 어려운 처지다.
그런 중에도 야곱은 하나님 섬기는 일을 최우선으로 했다.
  주인인 라반이 "여호와께서 너로 인해 내게 복을 주셨다"
할 만큼 하나님을 잘 섬긴 것이다.
둘째, 기도했다.
  삶의 현장에서는 우리가 예기치 않은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
금방이라도 내 삶을 송두리째 앗아갈 듯한 일들,
억울하고 분하여 밥맛도 없고 잠을 못자며 괴로워할 일들,
앞길이 막혀 어찌할 줄을 모르며 가슴을 졸이는 일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진퇴양난의 일들,
야곱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그 도우심으로 다 극복했다.
셋째, 말씀을 순종했다.
   그때그때 때를 따라서 주시는 말씀을 가감 없이 순종했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야곱의 주위 사람들까지도 축복하신 것이
그 증거이다. 말씀 순종이 없으면 하나님의 축복하심도 없다.
넷째, 하나님의 축복을 열심히 사모했다.
   태중에서부터 하나님의 축복하심을 사모해서
장자로 태어나려고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으며
믿음의 족장, 그리스도의 조상이되는 축복에 열심을 냈다.
하나님 축복에 열정을 가지고 사모하는 자가 축복을 받는다.

<일반적인 공력>
첫째, 사랑으로 자기 일을 감당했다.(31:38)
   수천마리의 암 양이 낙태가 없이 잘 태어난 것은
그만큼 사랑을 가지고 애정으로 양을 보살폈다는 것이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도 우리의 맡은 일을 사랑과 즐거움으로
할 때 그 일들이 실수도 없고 능률도 오르며
그런 우리의 수고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
둘째, 최선을 다해 맡은 일을 감당했다.(31:39)
   사나운 짐승들에게 양이 찢기거나 도적을 맞았을 때는
그것을 자기가 보충하면서 양을 쳤고 또 그러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맡은 양을 치고 자기 일을 감당한 것이다.
셋째, 불철주야 분투노력 했다. (31:40)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양을 돌보았다. 맡은 일을 책임을 지고
감당하며 노력하고 수고하는 사람에게 축복을 하신다.
넷째, 억울함을 참고 감당했다. (31:41)
   20년 직장생활에 열 번이니 2년에 한 번꼴로 품삯을
변경한 것이다.  억울하고 분하여 땅을 치며 주저앉을 일이다.
그러나 야곱은 이 모든 것을 참고 극복한 것이다.

   이렇게 신앙적으로 일반적으로 분투노력 했더니
하나님께서 야곱과 그와 함께한 사람들에게까지 복을 주셨다.
우리도 우리 자신의 분투노력으로 인하여 우리 자신은 물론
우리와 함께 한 사람들에게까지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도록
공력을 쌓는 믿음의 길을 가자!!

 
 2009. 5. 24. 용서


제      목: 용   서
성경말씀 : 골로새서 3 : 12 ~ 15

   사람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
사람이 불행하게 사는 이유 중 하나가
용서를 하지 않고 살기 때문이다.

   용서란 무엇인가?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하고 해를 끼친 것을
너그러이 받아주고 이해하며 없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은 용서 받기를  바라면서도
다른 사람의 잘못은 용서하기를 싫어하고 지체한다.

   용서를 하지 못하는 예를 살펴보면,
첫째, 나를 인격적으로 모욕하고 무시한다.
   얕잡아 보고 비난하며 험담을 하고 욕을 한다.
   배척하고 따돌리며 비웃고 모함하고 누명을 씌운다.
둘째, 나에게 물질적 손해를 끼쳤다.
   돈을 빌려가고 안 주며 사기를 쳐서 손해를 봤다.
   내 몫에 돈을 가로채고 주기는커녕 큰 소리를 친다.
셋째, 내 명예에 손해를 줬다.
   공식적으로 내가 승진할 위치인데 모종의 술수로
   다른 사람이 차지하고, 내가 이룬 업적인데 그 공로를
   가로채 가고, 공개적으로 무시하고 짓밟는다.
넷째, 오해 때문이다.
   사실 상대가 나를 모욕하지 아니 했는데
   물질에 손해를 주지 아니 했는데
   내 명예에 손해를 주지 아니 했는데
   순전히 내 쪽에서 오해하고 내가 욕심을 부려 착각하고
   상대를 미워하며 망하기를 바라고 벌 받기를 바라는
   이런 어리석은 때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섯째, 사회적 객관적 잘못이 일어났을 때
   직접적으로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으나
   시회적 정치적 경제적 도덕적 객관적으로
   크게 잘못한 사람들을 보고 공분을 느끼며
   그가 벌 받기를 바라고 망하기를 바란다.

   위와 같은 일들을 당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분이 나서 밥맛도 떨어지며 잠도 잘 못자며 괴로워하고
그 잘못한 대상들을 미워하고 싫어하고 배척하며
기회를 보아 앙갚음을 하려고 벼르게 되고
그 상대가 벌 받기를 바라고 심지어는 망하고 죽었으면 하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게 된다.
   그러나 이런 것은 그 상대보다도 오히려 자기 자신이
더 초라해 지고 몸과 마음이 상하고 죄를 짓게 되는 일이다.

   오늘 말씀은,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기를
주께서 너희를 용서 하신 것과 같이 하라" 하셨다.
본 말씀에 용서하라는 뜻은, 원어 "카리조메노이"로
아무 조건 없이 거저 값없이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즉 잘못한 상대가 나에게 사과를 안 하고 사죄도 안 하고
또 나에게 잘못한 것의 징벌을 받지 아니 했어도, 값없이 그냥
거저 용서해 주라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 죄를 그렇게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우리 죄를 용서하시되 값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우리 죄 값을 지고 십자가에 자기 목숨을 희생하여 주셨다.
또 우리 죄를 용서하시되, 일흔 번씩 일곱 번을 백 번도 넘게
수를 헤아릴 수없이 많이 용서하여 주셨다.

   우리가 이렇게 용서하는 삶을 살면,
첫째, 우리 몸과 마음에 평강을 주신다. (본문 15절)
둘째,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신다. (잠언 19 :11)
용서를 안 하는 사람보다 용서하는 사람이 훨씬 더 행복하다.

2009. 5. 17. 좋은 습관을 기르자
 
제    목 : 좋은 습관을 기르자
성경말씀 : 누가복음 22 : 39 ~ 43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앞두고
습관을 좇아 감람산으로 올라 가셔서 기도를 하셨다.

   습관이란 무엇인가?
여러 번 반복하여 행하므로 익숙하게 굳어진 말씨나
마음씨, 행동의 자세를 말한다.
   따라서 나쁜 습관이든 좋은 습관이든 한 번 습관으로 몸에
굳어지면 바꾸기가 쉽지 않은 것으로,  자기 몸에 익숙하게
굳어지기 전에 자신을 살펴서 나쁜 습관을 버리고 좋은 습관
으로 길러 가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며 축복받는 지름길이다.

   오늘 말씀에서 일반적 습관 세 가지와
신앙적 습관 세 가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일반적 습관에서는

첫째, 좋은 말의 습관을 길러야 한다.
   흔히 쓰는 말로 "말버릇이 안 좋다"고 하는데,
자기감정 내키는대로 함부로 말하는 것이 무심코 여러 차례
반복되므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러한 말투가 익숙해져서
잘못된 말의 습관으로 굳어진 것이고,
"좋은 말을 한다"는 것은, 한 번 두 번 좋은 말을 하려고
애쓰고 노력하여 그 노력이 여러 번 반복되므로 익숙해져서
좋은 언어 습관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렇기에 에베소 4:29 절에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으로 내지도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필요한 대로 선한 말을 하여 은혜를 끼치라" 하셨고
5:4 절에는 "더러운 말 어리석은 말 희롱의 말이 마땅하지
않으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하셨다.

둘째, 좋은 마음을 가꾸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편벽되고 이기주의적인 마음을 벗어나서 넓고 큰마음,
죄악 되고 부정한 마음을 버리고 깨끗하고 평화로운 마음,
집착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지 말고 너그러이 포용하는 마음,
스스로가 자기 마음을 살펴 자꾸 가다듬고 가꾸어 나가면
그것이 습관이 되어 좋은 마음으로 안정된다.   그러나
감정 내키는대로 마음을 품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편협하고 자유 방종한 마음이 그대로 익숙해져 죄악을 품게
되고 자기 스스로 불행에 빠지게 된다.

셋째, 좋은 행동 습관을 길러야 한다.
   "손버릇이 나쁘다"  나쁜 행동 습관의 한 부분을 말함이다.
몸의 자세나 행동도 좋은 자세 좋은 행동으로 힘써 반복하면
그에 익숙해져 자연스럽게 좋은 행동이 되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방임하면 나쁜 행동 습관으로 굳어져서
죄악을 행하고 방탕해져 망하게까지 된다.


   이제 신앙적 습관을 세 가지로만 살펴보자.
첫째, 기도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본문 말씀에 예수님은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서 기도하셨다.
평소에 이런 일 저런 일 있을 때마다 산에 가서 기도하셨고
이일이 여러 번 반복되다 보니 좋은 생활습관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우리 자신은 어떠한가?   크고 작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근심 걱정하는 것으로 습관이 되었는가?  아니면
주님께 기도하여 힘을 얻고 감당하는 것으로 습관이 됐는가?
기도할 때 은혜가 임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우리가 삶에  승리자가 되고 신앙의 행복을 누릴 수가 있다.

둘째, 모이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히브리서 10:25 말씀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모이기를 힘쓰라" 하셨다.
말세가 되면, 신앙의 공동체로 모이는 것을 폐하고 개인적
이기주의가 되어 방종 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을 경계하셨다.
   따라서 모이기를 힘쓰는 것은 신앙생활의 기본이며
하나님 사랑과 은혜를 받는 비결 곧 축복 받는 비결이다.
분주한 생활 속에서도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 앞에 모이기를
힘써서 이일이 우리 삶에 습관으로 자리 잡도록 해야 한다.

셋째, 말씀을 청종(聽從)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예레미야 22:21 말씀에 하나님께서 여호야김 왕에게
"어려서부터 내 말을 청종치 않음이 네 습관이라" 책망하셨다.
  과연 우리는 어떤가?
하나님 말씀을 듣기를 좋아하고 또한 순종하기를 좋아 하는가?
말씀을 들을 때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존귀하게 들어야 한다.
들은 말씀을 삶의 터전과 생활에서 순종하기를 힘써야 한다.
이런 일들도 자기를 가다듬으며 힘써 반복하므로 좋은 습관으로
자리 잡게 되며 축복 받을 자격이 만들어 지게 되는 것이다.
   말씀이 선포될 때 듣기를 싫어하고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히고
말씀을 들었다 해도 순종하기를 더디하고 싫어하면 그 사람은
축복을 받을 자리에서는 점점 멀어지게 된다.
   내 삶과 신앙의 습관을 살펴서 이제라도 좋은 습관으로
길러 가야 한다.  영원한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2009. 5. 10. 참 사랑
 
제     목 : 참  사랑
성경말씀 : 고린도전서 13 : 1 ~ 7

   "사랑"은 너무나 흔히 쓰는 말이면서도
인간의 삶에서 그 무엇보다도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개척하여 세운 교회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교회였다.
   당파로 분열이 있었고, 십자가의 도 복음의 능력을 부정하며,
괴악한 음행사건과 남녀의 지위문제, 우상숭배와 제물,
잘못된 은사관과 부활관 등, 이런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축복받을 신앙으로 발돋움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본문말씀을
통하여 "사랑" 뿐임을 제시하셨다.

   1~3 절은 사랑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씀하셨으니,
첫째, 사랑은 방언과 천사의 말보다도 월등하다.
둘째, 사랑은 예언의 능력이나 성경의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보다도 위대하다.
셋째, 사랑은 전 재산을 바치는 구제나 자기 목숨까지 희생
                 하는 자선사업보다 고귀한 가치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천사의 아름다운 말이나 방언하기를 사모하고,
예언의 능력과 말씀의 비밀에 통달한 지식과 산을 올길만한
믿음을 동경하며, 전 재산을 바치는 자선 등을 우러러 본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얻고 이루었다 하여도 그 중심에
하나님 사랑에서 나온 참 사랑이 없다면 모든 것은 속임수요
헛된 것이며, 또한 방언을 못하고 예언의 능과 성경의 비밀에
관한 지식이 없다 하여도 참 사랑이 있다면 그는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성공적 삶을 산 것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삶을 제일 가치 있고 복되게 하는 참 사랑,
그 참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
   본문에서 열다섯 가지로 말씀을 하셨으니

첫째,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 내 사랑의 대상자들이 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고, 내 진심을 몰라주거나 내 사랑의 결과가
좋게 나타나지 아니 해도, 오~래~참고 또 참으며 사랑을
베풀어 가는 것이 참된 사랑이다.

둘째, 사랑은 온유한 것이다.
   따스하고 부드럽고 평안하며 포근히 감싸주는 것이다.
차갑고 두렵게 하고 무섭고 위협적인 것은 사랑이 아니다.

셋째, 사랑은 투기하지 아니한다.
   이웃이 잘 될때, 설사 그가 경쟁 상대라 하여도
축하해 주고 협력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참 사랑이다.
훼방하고 시기하고 못되기를 바라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넷째,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 한다.
   잘한 일이 있어도, 큰 업적을 이루었어도, 그것을 자랑하고
생색내는 것은 참 사랑이 아니다.  마땅히 할 일을 한 것으로
주님께 감사드리며 더 잘하고자 하는 것이 참 사랑이다.

다섯째,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 한다.
   우월감을 가지고 상대를 낮게 보며 자기 고집 자기 생각대로
하려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진정 월등하다 해도 겸손하여
상대를 존중하며 배려하는 것이 참사랑이다.

여섯째,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 한다.
   가깝든 멀든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예의를 갖춰 대하는 것이
참 사랑이다.  잘 안다고 예의 없이 대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일곱째,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 한다.
   이기주의는 사랑이 아니다.  상대의 유익을 생각하여
섬기며 받들며 베풀어 주는 것이 참 사랑이다.

여덟째, 사랑은 성내지 아니 한다.
   화날만한 때 마음 속 화까지도 잘 다스리는 것이 사랑이다.

아홉째,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 한다.
   악한 것 죄 된 것은 생각이라도 버리고
선한 것 좋은 것을 생각하고 행하는 것이 참 사랑이다.

열째,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 한다.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게 잘못 나가고 일반 상식에도 어긋나게
불의를 행할 때는 단호히 책망하고 바로 잡는 것이 사랑이다.

열한째,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하나님 말씀과 예수님이곧 진리이다.  그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말씀에 합당하고 예수님과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다.   예수님과 함께 기뻐할 수 없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열두째, 사랑은 모든 것을 참아 나가는 것이다.
열악한 환경 답답하고 괴로움이 있어도 잘 참아 나간다.

열셋째, 사랑은 모든 것을 믿어 주는 것이다.
   상대가 잘하고 바로하고 좋게 될 것을 염원하는 것이다.

열넷째,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란다.
   상대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잘 되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열다섯째,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어 낸다.
   견디지 못하고 좌절하거나 포기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어떤 환경이든지 잘 견디어서 이겨내는 것이 참 사랑이다.
견디어 내는 자만이 승리하고 참 행복을 누리게 된다.

 
 2009. 5. 3.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라
 
제     목 :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라
성경말씀 : 사도행전 10 : 1 ~ 6

   가이사랴는 이스라엘 북서쪽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구도시로 수도에 버금가는 대도시다.
여기에 로마에서 파견된 군부대가 있고 이 부대의 백부장이
"고넬료"다.

   고넬료가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했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 상달되어 큰 축복을 받아 누렸다.
  5월은 가족들의 모임이나 행사가 많은 달이다.
여러 가지 모임과 행사가 있겠으나 그 중 제일 좋은 일은
온 집으로 더불어 온 가족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다.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은
쉬운 것 같지만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여기 말씀의 뜻은
누구의 강요나 분위기에 따른 체면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닌
자발적 즐거움이 넘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느 집이든지 온 가족이 한 순간에 똑같이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는 일은 드물다.  그 집에서 누군가
한 사람이 먼저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사람을 통하여 그
집 가족들에게 복음이 심어지고 확산되어 점점 온 가족들이
함께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 믿은 그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온 집이 하나님을 경외하게도 되고 또한 불신하게도 되는데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고넬료 가정에서
그의 아름다운 신앙 활동을 살펴보면,

첫째, 고넬료는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다. (2, 30절)
   주둔군 부대 백부장으로서 부하들 통솔하랴, 정보 수집하랴,
지역 유지들과 교제하랴, 치안 질서 유지, 가정사 등
할 일이 많고 분주함에도 그는 매일매일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기도를 하되 기도하는 시늉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상달될만한 진실 된 기도를 드렸다.
   우리가 하루의 첫 시간인 새벽에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이 좋고, 교회에까지 나와서 기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집에서 또는 삶의 현장에서 일과 중에 틈을 내어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역사를
하신다.  본문에서 고넬료는 자기 집에서 오후 3시쯤에 기도
드렸다.  자신의 믿음과 가족들의 믿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신앙과 삶을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과연
집이나 삶의 현장 어느 곳에서 일과 중 틈을 내어
오후 3시쯤에 기도한 일이 얼마나 있었는가?
   가족들의 영혼, 온 집안의 믿음을 위한 기도를 꾸준히 하고
하나님께 상달되는 진정한 기도를 드려서 구원의 역사가 일어
나고, 온 가족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둘째, 고넬료는 모범이 되는 생활을 했다.(2,22절)
   "그가 경건하여"
치안을 담당하고 정보를 수집하려면 지역 기관장들과의 교제나
접대하고 접대 받는 일들이 많이 있다.  그럼에도 술, 담배,
도박, 투기, 유흥주점 등 타락된 문화를 멀리하고 경건생활로
가족들이나 부대원들과 심지어는 유대인들까지도 고넬료를
칭찬하는 모범적인 생활을 하였다.
   먼저 믿은 사람으로서 가족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지 못하면 가족들이나 주위 사람들을 믿음의 세계로 인도할
수가 없다.  모범이 되는 경건한 신앙생활,
하나님 말씀에 합당한 생활을 했기에 가족들을 비롯하여
종졸들까지 본을 받고 다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 것이다.
   과연 나 자신은 가족들과 이웃들에게 모범이 되는 생활을
얼마나 하고 있는가?  온 가족이 함께 하나님을 섬기며
축복 받기를 소원하면서도 경건한 모범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소원은 그만큼 더디고 어렵게 될 것이다.

셋째, 자신을 희생하고 수고하여 사랑을 베풀었다.(2,4절)
   주둔군 부대의 부대장으로서 술수를 써서 재물을 모으고
오만하며 백성들을 압박하는 것이 당시에 상황이었다.
그러나 고넬료는 자기 것을 희생하고 수고하여 어려운 백성들을
돕고 구제하며 사랑을 베풀었다.  자기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기 위한 전시(展示)적 선행이 아닌 진정한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사랑이었다.
   오늘날도 자기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한
선전용 전시적 선행은 많이 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으로
자신의 것을 희생하고 수고하여 베푸는 사랑은 드물다.
   고넬료는 이런 아름다운 신앙생활로 온 가족들은 물론
종졸들과 일가와 친구들까지도(24,44절) 함께 예수님을 믿는
구원의 축복을 받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귀감으로 기록
되었으며 천국에 예비 된 신령한 축복을 받게 되었다.

   우리도 온 가족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도록
고넬료의 신앙을 본받아 나가자!  그리고 별 다른 행사보다도
가족들이 함께하여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자!
   훨씬 축복된 5월이 될 것이다.


 2009. 4. 26. 신비로운 영의 세계

 
    제     목 :  신비로운 영의 세계
       성경말씀 : 에스겔 1 : 4  ~ 14

   본문은 에스겔 선지가가
 주전(B.C) 692년경 그발 강가에서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신비로운 영의 세계를 본 말씀이다.

"북방에서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
 번쩍하며 빛이 사면으로 비취고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났는데 사람의 형상 같았다."
네 생물은 다니엘서나 계시록에도 나오는데 천사를 뜻한다.
(에스겔 10:15) 생물은 "그룹" 이라 했는데 이 그룹이
천사들의 한 무리의 이름이다.
   에스겔이
천사(생물)들의 신비로운 형상과 성품 기질을 보았으니,
천사들은 얼굴이 넷이고 날개가 넷이며 다리는 곧고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으며 날개는 서로 맞닿아 있었다.
   우리가 보통 천사의 날개가 두 개라 생각하는데 물론
두 날개의 천사도 있고, 여섯 날개의 천사도 있으며(사 6장)
본문에서처럼 네 날개의 천사도 있다.
"다리는 곧고"(7, 9절)
다리는 오고가고 행동하는 것을 뜻하는데 곧다 했으니
천사의 행동이 바르고 곧고 반듯하다는 것이다.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구리 같이 빛난다." (7절)
송아지 발바닥은 두 쪽으로 굽이 갈라져 있어 곧 구별 분리된
것을 뜻하니, 천사들의 생활과 활동이 죄와 불의와 부정한
것에서 구별되고 분리된 깨끗하고 거룩한 것이며 이 생활이
익숙해져서 잘 닦은 구리처럼 빛이 난다는 뜻이다.
"날개는 서로 연하여(맞닿아)  있다"(9,  11절)
이는 천사들이 서로 연합하고 협력하여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이루어 나간다는 뜻이다.

   위와 같은 천사들의 활동과 기질을 보여 주신 것은
곧 우리로 하여금 모델로 삼으라는 하나님의 뜻이다. 따라서
1) 우리의 행동이 바르고 곧고 반듯해야 된다.
   행동이 비뚤어지고 구부러져 곁길로 나가는 것은
믿음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할 일이 아니다.
우리의 언행심사가 천성을 향하여 곧고 바르게 나가야 한다.
2) 구별되고 분리된 생활을 해야 한다.
   세상 타락된 문화와 죄악된 것들을 분별하여
  그런 부정한 것들과
분리되고 멀리 떨어진 거룩하고 깨끗한 생활을 해야 한다.
3) 연합하고 협력해야 한다.
   우리는 각각의 자유의지가 있고 자주성이 보장되어 있다.
그렇다 하여도 가족끼리도 서로 연합하고 협력하여 가정을 세워
나가고, 직장에서도 공동관심사에 연합하고 협력해서 일하며,
교회에서도 각각의 신앙생활이 있으면서도 개인끼리 부서끼리
연합하고 협력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뜻을 받들어 나가야 한다.

   천사들의 얼굴은 사면이 얼굴인데 (10절)
"앞면은 사람의 얼굴" 사람은 품격이 있고 지혜가 있다.
   천사에게 지(知)  정(情)  의(意)의 고상한 품성이 있고
   지혜가 있어 하나님을 섬기고 뜻을 받들어 드림에 온전하다.
"우편은 사자의 얼굴"  사자는 용맹 능력 영광이 있다.
   천사가 불의한 세력과 악령들을 제압하고 물리침에 있어
   용맹스럽고 능력이 있고 영광스럽게 이루어 나간다.
"좌측은 소의 얼굴"  소는 희생 봉사 충성을 한다.
   천사들이 하나님을 섬기며 그 뜻을 받들어 나감에 있어
   희생 봉사하고 충성하여 부족함이 없이 이루어 간다.
"뒷면은 독수리의 얼굴'  독수리는 금수의 왕 창공을 난다.
   창공을 선회하며 땅의 것을 내려다보고 위엄이 있게 산다.

   네 얼굴은 곧 천사들의 품성과 기질을 나타낸 것이니,
오늘날 우리들도 이런 성품과 기질로 좋게 가꾸어 가야 한다.
1) 앞면은 사람의 얼굴
   품성이 좋지 못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일이 있고
지혜가 부족하여 일을 그르친 일이 많이 있는 우리들이다.
우리의 품성을 고상하고 거룩하고 아름다운 품격으로 가꾸고
지혜에 지혜를 얻어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
   아름다운 품성과 지혜를 얻는 비결은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며 성령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
2) 우편은 사자의 얼굴
   우리가 죄악과 마귀 악령과 불의한 일들을 끊고 싸우는데
사자처럼 용맹스럽고 능력 있게 싸워 승리해 나가야 한다.
3) 좌측은 소의 얼굴
   하나님을 섬기며 그 뜻을 받들어 나감에 있어
희생 봉사 충성하여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보은해야 한다.
4) 뒷면은 독수리 얼굴
   독수리는 창공을 선회하며 땅의 것들을 내려다보고
제압하며 위엄 있게 산다.  우리 역시도 창공, 즉 하늘의 높고
신령한 세계, 기도와 말씀의 높은 영적 세계에서 땅의 것들을
내려다보며 하늘의 것을 소망하며 살아가야 한다.

 2009. 4. 19.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

 
 제     목 :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
성경말씀 :  창세기 25 : 19 ~ 26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신구약 성경 66권을 통하여 다 밝히셨고
오늘 말씀에서도 나타내셨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살펴 깨달음을 얻고 은혜를 받고자 한다.

   아브라함이 백세에 낳은 아들 이삭,
이삭이 사십 세가 되어 리브가를 아내로 맞아 결혼을 했는데
1년, 2년, 3년이 되어도 아이 소식이 없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기도를 드렸으나 10년, 15년에도
아이 소식이 없어 더욱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렸다.
   하나님께서 이삭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셔서
결혼 19년째에 잉태하여 20년 되는 해에 아들을 낳으니
쌍둥이로 형은 에서, 동생은 야곱이었다.
   이삭이 이렇게 어렵게 아들을 얻은 것에 비해
이삭의 이복 형 이스마엘은 결혼 후 이어 열두 아들을 낳고
그들이 다 잘되어서 각 고을 다스리는 방백들이 되었다.

   이삭과 이스마엘을 비교해 보면
이삭은 아브라함의 본부인인 사라의 소생이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자손으로 믿음생활 기도생활을 잘하는데도
결혼 후 19년 동안이나 아들이 없어 애를 태웠고,
이스마엘은 첩의 소생으로 믿음도 변변치 못하고 기도생활도
잘 안하는데 결혼 후 열두 아들을 낳고 방백들이 된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하나님께서는 천하 만물들이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데 이런 일들을 "일반은총"이라 한다.
선인의 밭에만 비를 주시는 것이 아니고 악인의 밭에도 비를
주시고, 의인에게만 햇빛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불의한 자
에게도 햇빛을 내려 주시며 하나님을 배척하고 반대하는 자
들에게까지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은혜를 주시는 것이며
이런 일반 은총에 의하여 이스마엘도 번성하게 하신 것이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왜 이렇게 어렵게 아들을 주셨는가?
얼핏 생각하면 이삭이 불행한 삶을 산 것처럼 여겨지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시려고 이렇게 섭리를 하신 것이다.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하나님의 창조하심과 경영으로 존재하며 생을 유지하는데
자손들을 비롯하여 세상의 모든 일들이 자연스럽게 잘 되면
사람의 심리가 자기가 잘해서 그렇게 잘된 줄 알고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외면하고 배척하게 되며 그런 삶의 결국은
영원한 저주와 형벌이요 훨~ 훨~ 불타는 지옥 멸망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에 사랑하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찾아 섬기며
복 받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환경을 만들어 인도하시는데
본문에서 그러하신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신 것이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친근한 교제를 원하신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으시다.
이러하신 하나님을 이해하고 받들어 주며 친근하고 밀접한
교제로섬길 백성들이 있어야 하는데, 모든 일이 형통하게 잘
되면 사람들이 하나님께 찾아 나와 하소연하고 섬기며 교제할
마음을 갖지를 아니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백성들이 하나님께 찾아와
친밀한 교제를 할 수 있도록 뭔가 부족하게도 만드시고, 일의
어렵게도 하여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부르시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우리 기도와 기도에 응답을 기뻐하신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무엇이든 다 이루실 수 있는데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도움을 청하러 오는 사람도 없다.
자, 어떤 사람이 짐을 운반해 주려고 25톤짜리 트럭 만 대를
샀다.  그런데 짐 운반을 부탁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이 얼마나 섭섭한 일이 되겠는가?!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백성들이 스스로 찾아 나와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여건을 조성하고 만드셔서
백성들의 기도를 기뻐 받으시며 그 응답하심을 기뻐하신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베푸시며 사랑받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천하 만물을 사랑하시며 특별히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택한
백성들을 사랑하신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자신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통하여 자신께서도 사랑 받기를 원하신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결혼한 19년째까지 잉태를 못한 것은
이제 리브가의 잉태는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한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보니 이삭과 리브가가 하나님의 사랑을 절실하게 느끼고
하나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사랑하시고 사랑 받기를 원하셔서
우리에게 이러한 여러 환경과 조건을 만드시고 인도하신다.

 
 
 2009. 4. 12.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다.
 
제     목 :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다.
성경말씀 : 요한복음 11 : 25 ~ 27

   부활주일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값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죽으신 3일 만에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신 승리의 절기다.

   우리가 이 부활절 절기를 지키고 누리게 된 것은
너무도 감사하고 자랑스러우며 영광스럽고 축복된 일이다.
   현존하는 수백만 개의 종교가운데,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산
부활절을 지키는 종교는 오직 우리 기독교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다른 종교에서는 부활절이 없는가?
그 종교의 신이나 교주가 죽음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여
지옥형벌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뜻은

첫째,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 그 자체시요 본체이시다.
   예수님이 아니고는 부활도 없고
예수님이 아니고는 생명도 있을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고 완전무결하시며 영원불변하시니
곧 부활과 생명의 본체시요 그 근원이시다.
   천지 창조 때에 아무 것도 없는 무(無)에서 유(有)로
만물을 지으셨으며, 죽은 생명을 부활시키고 새로운 생명을
만드시는 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하시는 사역이다.

둘째,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의 원동력이시다.
   천상천하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은
오직 예수님으로 인하여 부활하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만
생명을 얻고 또 얻는다.  예수님이 없이는 그 어떤 생명도
존재할 수 가 없고 예수님이 아니고는 그 어떤 생명도 죽음
을 이기고 부활할 수 가 없다.
예수님은 모든 생명과 부활의 원동력이시기 때문이다.

셋째, 예수님은 모든 부활과 생명의 영존(永存)체이시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는 말씀은,
한 번 예수님을 믿어서 부활하고 살아난 생명체는 영원히
죽지 않고 존재한다는 뜻이다.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흙에서 취했으니
흙으로 돌아가고, 그 영혼은 예수님을 믿어 거듭나고 살아났기
때문에 천국에 올라가 영원한 생명으로 복락을 누린다.
   이러하므로 우리 예수님은,
모든 생명과 부활체를 영원히 존재케 하시는 영존체이시다.

예수님께서 본문 말씀을 하신 배경은,
나사로가 죽을병이 들어 예수님께 도움을 청했는데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나흘째 되는 날에야 도착을 하셨다.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말하길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나사로가 죽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 오라비가 살 것이다." 하셨고
마르다는 "예 마지막 날에는 살 것입니다" 하니, (24절)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라, 네가 믿느냐" 하셨고
마르다가 "주여 그러하외다 믿습니다" 고백했다. (27절)
그러나 막상 "무덤 굴에 있는 돌문을 옮겨놓아라"하시니
마르다가 "죽은 지 나흘이라 썩어서 냄새가 납니다" 만류한다.
예수님은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시므로
돌문을 옮겨 놓으니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시니
죽은지 나흘이 되어 썩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가 온전해져서
살아 걸어 나왔다.
   이러므로 예수님은 자신께서 말씀하신대로
부활과 생명 그 자체시며, 부활과 생명의 원동력이시며,
부활과 생명을 영존케 하시는 영존체이심을 증명하셨다.

 여기서 마르다의 믿음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24절에서 마르다는 막연하게 먼 훗날의 부활을 믿었다.
27절에서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산 믿음이 아닌 지식적인 믿음이었다.
그 증거가 무덤 돌문을 굴려 놓으라 하실 때, 죽은 나흘이 돼
썩어 냄새가 난다며 만류한 사실이다.
   즉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부활이요 생명
인줄 알면서도 지금 당장 죽은 나흘이 되어 썩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 시신 앞에서는 예수님의 부활과 생명도 어쩔 수 없는
무용한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만류를 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 믿음인가?
먼 훗날 예수님의 재림 때 부활을 믿고 예수님을 믿으면 죽어도
산다는 것을 믿으면서도, 당장 현실에서 나 자신이나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들이 죽을 때에 예수님을 믿음으로 죽어도 다시
살아 천국복락을 누린다는 확신 가운데 감사함으로 맞이할 수
있는지.... 오늘날도 주님께서는 이런 믿음을 원하신다.
 
 2009. 4. 5. 우리도 주님을 외면할 것인가?
 

     제     목 : 우리도 주님을 외면할 것인가?
     성경말씀 : 요한복음 16 : 12 ~ 18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 값의 형벌을 담당하시려
로마 군병들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그 병졸들에게 잡혀서
결박당하여 끌려가실 때의 일이다.

   수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외면하고 도망갔고
겨우 베드로와 요한 사도만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안나스 제사장 집에 끌려가셨을 때는
요한도 예수님을 외면했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다.  이렇게 되므로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잡혀서 고통을 받으실 때는 다 외면하고
등을 돌리고 말았다.
   이들은 보통 신자들이 아니고 사도로 세움 받은
특별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다 외면했으니
지금 우리가 그 일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참으로 안타깝고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때 당시엔 유대교 지도자들과 병정들이 눈에
불을 켜고 살기등등하여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잡아 가두고 심문하여 처형까지 하려는 때이니까 제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외면이 조금은 이해가 될 법도 한데,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런 위험한 요소가 전혀 없이 평안하고
자유로운 형편임에도 예수님을 외면하는 일이 많으니
진실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고난주간을 맞이해서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외면하는 일은 어떤 것이며
예수님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첫째,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을 생각하며 감사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왜 고난을 당하셨는가?  우리 죄 값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우리 죄 값 때문에 형벌과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을 생각도 아니 하고 기억치도 않으며 감사 감격하는
마음도 없이 무심히 지나쳐버린다면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외면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제아무리 바쁘고 힘들다 하여도
그 분의 살을 찢기시고 뼈가 으깨지는 죽음의 고통과 형벌이
바로 우리 죄 값을 대신하기 위함이신데
   우리가 모른척하고 세상일에만 매달려서야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고 성도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사실은 평소 생활에서 그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하며
살아야하지만 특별히 고난 주간만이라도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생각하고 기억하며 감격하며 살아야 한다.

둘째,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빌 1:29)
주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당하신 고난의 깊이와 넓이가
어떠한지 조금이라도 그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우리의 도리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르지 못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아멘으로 화답하며 갑절에 갑절의
축복을 소원하면서도 정작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 그 고난에는
동참하기를 꺼려한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우리가 주님의 축복과 영광에만 아니라
주님의 당하신 고난에도 함께 하기를 원하신다.
   믿음의 선진인 모세는 (히 11:24~26)
"믿음으로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이집트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시는 이를 바라봄이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욕을 먹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도 아니요 결코 실패하는 일도 아니다.
  고난을 이기시고 얻으신 부활의 승리와 영광에 참여하기
위하여 우리도 고난을 받아보는 것이 마땅한 도리인 것이다.

셋째, 우리 자신을 희생하여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5)
주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죄악의 형벌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온 몸과 마음과 영까지 다 희생하여 주셨다.
  이에 우리도 우리 것을 다 희생하여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은혜를 모르는 것은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
세상일에 파묻혀서 주님을 모른다고 외면하는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며 감사하고 그 고난에 참여하여
주님 영광을 드높이고 그 영광과 축복에도 참여하자 !!
  
    
  2009. 3. 29.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2]
 
제     목 :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성경말씀 : 아가 4 : 12 ~ 16

   아가서는 솔로몬의 기록이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솔로몬 왕 자신과 술라미 여인의 사랑 노래를 통하여
주님과 참 성도들 간에 사랑의 어떠함을 나타내신 것이다.

12절 :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동산" "우물" "샘"은 모두
성도의 "영적 신앙의 세계" 곧 "신앙의 내면세계"를 뜻한다.
   주님께서 잠근 동산을 덮은 우물 봉한 샘을 열고
성도의 영적 신앙의 세계, 그 속 내면을 들여다보니 거기엔
아름다운 것이 가득 찼고, 향기가 나며, 보배보다 귀하고,
썩는 것을 방지하며, 시원케 하는 것이 가득했다.

   주님께서 칭찬하시고 사랑스러워 하신 내용은?
첫째, 아름답다. (석류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주님께서 아름답게 보시는 것은 무엇인가?
성경의 아홉 가지 열매이다. (갈 5:22)
 1) 사랑 : 사랑을 베풀고 나눠주는 사람은 아름답다.
 2) 희락 : 웃음을 머금고 기뻐하는 사람을 보라, 아름답다.
 3) 화평 : 시기 질투 이간질을 멀리하고 화평케 하는 사람,
             역시 아름다운 사람이다.
 4) 인내 : 어렵고 힘든 형편을 잘 참고 견디니 아름답다.
 5) 자비 : 불쌍히 여겨 베풀어 주는 사람 역시 아름답다.
 6) 양선 : 선을 행하고 만들어가는 사람도 아름다운 사람이다.
 7) 충성 : 구슬땀을 흘리며 충성하는 사람도 아름답다.
 8) 온유 : 따스하고 부드럽고 친절하니 아름다운 사람이다.
 9) 절제 : 잘못 된 것을 끊어버리고 새 출발하는 사람 역시
             아름다운 사람이다.   아무리 용모가 아름다워도
             잘못 된 것에 우유부단하면 얄미운 사람이다.
   좋은 소식, 평화, 복 된 좋은 소식을 전파하며
산을 넘는 사람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
   주님께서는 성도들이 고난을 받으며 전도를 할 때 그 발
  까지도 아름답게 보시고 칭찬을 하신다. (이사야 52 : 7)

둘째, 향기를 날린다. (유향목과 모든 귀한 향품)
   성도들 신앙의 내면에서 나오는 좋은 향기는 무엇인가?
성삼위 하나님께 마음과 정성을 바쳐 기도하는 기도 내용을
천사가 금향로 금대접에 받아서 향연과 함께 하늘보좌에 올려
하나님께서 향기로 흠향하신다. (계 5:8, 8:3~4)
   주께서 도우셔서 수고하여 얻은 재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께 헌금으로 드릴 때 향기롭게 받으신다. (빌 4:16~18)

셋째, 진귀(珍貴)하다. (모든 귀한 향품이요)
   성도신앙의 내면세계에 보배보다도 더 진귀한 것이 있으니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만 사죄를 받는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다. (벧전 1:18~19) 과연 그러하다.
   이 세상의 제 아무리 진귀한 보배라도 이 세상에서 살 때
조금 소용될 뿐이지 죽은 다음에는 소용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천국에 가서도 유용하고 또한 말씀을
믿고 따른 그대로 상급과 영광을 누리기 때문에
믿음은 보배보다도 더 보배로운 것이다.

넷째, 부패를 방지한다. (몰약과 침향과 향품)
   몰약은 향도 좋지만 부패 즉 썩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가
큰데, 사람을 영, 육간에 썩어짐에서 방지해 주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온전케 하려 함이라 (딤후3:16)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이 깨끗하여...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된 것이라 (벧전 2 : 22~23)
  사람이 말씀을 붙들지 않기 때문에 죄 짓고 타락을 한다.
말씀을 붙드는 사람은 자기를 깨끗이 지키고 썩음을 방지한다.

다섯째, 시원케 한다.(샘과 레바논에서 흐르는 시내)
   레바논 높은 산에 만년설이 쌓여있어 그 눈 녹은 물이
한 여름에도 흘러내려 많은 사람을 시원케 해주는데 이는 곧
성도들의 순종을 뜻한다.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은 주인을 시원케 한다.
이리저리 핑계 대며 불순종하는 사람은 주인을 답답케 한다.
그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났다고 말씀한 것이다. (삼상 15:22)

  자! 우리 신앙의 내면세계를 주님이 보신다면
과연 우리에게도 이런 아름다움과 향기가 진귀한 것이며,
썩음을 방지하고 주님을 시원케 하는 순종함이 있는지?
   조금씩은 다 있을 것이다. 이제 더 많이 더 크게 가꾸어서
주님을 더욱 기쁘게 해드리고 더욱 시원케 해드리자!!

 
 2009. 3. 22.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1]
 
 제     목 :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
성경말씀 : 아가 4: 12 ~ 16

   아가서는 솔로몬의 기록이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솔로몬 자신과 술라미 여인의 사랑의 관계를 비유로 하여
주님과 참 성도들 간에 사랑의 어떠함을 나타내신 것이다.

   본문의 12절에서 15절까지 말씀은
솔로몬 왕이 술라미 여인의 아름다운 사랑을 감탄하여 노래한
것으로, 곧 주 예수님께서 참 성도들의 주님을 향한 사랑을
칭찬하고 노래하신 것이다.
12절 :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주님께서 참 성도를 나의 누이라 하신 것은
1) 예수님과 성도는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섬기는 근본이 같고
2) 한 번 정해진 오누이 관계가 변치 않는 것처럼,
   주님과 성도의 관계가 영원토록 변치 않는 것을 뜻하셔서
   "누이"라 칭하신 것이다.
   또한 신부라 칭하신 것은
1) 신부가 신랑에게서 합법적인 사랑을 받을 대상자로
   선정된 것처럼, 성도들도 신랑이신 예수님으로부터 합법적인
   사랑을 받은 대상자로 떳떳하게 확정되었다는 뜻이다.
12절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동산" "우물" "샘" 은 모두
성도의 "영적 신앙세계" 곧 "신앙의 내면세계"를 뜻한다.
그런데 왜 잠근 동산, 덮은 우물, 봉한 샘인가?
   성도 신앙의 내면세계를
1) 거룩하고 깨끗하고 아름답게 가꾸었기 때문이다.
   동산을 열어놓고 우물과 샘을 덮지 않으면
   사나운 것, 더러운 것, 온갖 잡된 것이 다 들어온다.
2) 이미 거룩하고 깨끗해진 것을 보존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봉하고 덮지 않으면 잡되고 더러운 것들이 들어와서
   기왕에 거룩하고 깨끗하게 가꾼 것까지 다 더럽힌다.
3) 동산과 샘, 우물을  주인께서만 즐기시도록 하려 함이다.
   잠궈 놓고 덮고 봉한 것은 주인만이 열수 있고
   그것을 즐기고 누릴 권세가 주인께만 있는데, 곧 주인이신
   예수님만 모시고 예수님께서만 즐기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주님께서 참 성도의 신앙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니
온갖 아름답고 좋은 것으로 가득 차있어 감탄을 하셨으니

1) 아름답다. (석류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석류란, 겉으로는 볼품이 없지만 그 안은 진주보다 더 고운
   영롱하게 빛나는 알알이 가득하니 성도의 신앙 내면세계가
   그렇게 아름답다는 것이다.
2) 향기를 날린다.  (나도초와 유향목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성도의 신앙생활이 신선하고 고상하여 주인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을 상쾌하게 해주는 좋은 향기를 날린다는 것이다.
3) 진귀(珍貴)하다. (모든 귀한 향품이요)
   나드향만 해도 한 근에 삼천 만원이나 되는 값비싼 것으로
   성도의 영적 신앙의 세계가 보배롭고 가치 있는 진귀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4) 부패를 방지한다.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
   몰약은 향도 좋지만 부패, 즉 썩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어 시신을 처리할 때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는 곧 참 성도가 자기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이웃의 타락과 범죄까지도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5) 시원케 한다. (샘과  레바논에서 흐르는 시내)
   레바논은 높은 산들이 있고  정상에는 만년설이 하얗게 쌓여
   있어 그 눈 녹은 물이 한 여름에도 흘러내려 많은 사람들의
   갈증을 해결해주고 시원케  하는데,  성도의 신앙생활이 깨끗
   하고 시원해서 주님 마음을 늘 시원케 해드린다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우리 신앙의 내면세계는 어떤가?
과연 아름다운 것으로 가꾸어져 있고, 상쾌한 향기를 날리며,
허접 쓰레기가 아닌 진귀한 것으로 꾸며져 있고, 죄에 물들지
않고 자신을 정결케 하며 이웃의 타락과 썩음을 방지해주는,
주님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신앙의 삶을 살고 있는지?

   주님의 칭찬을 받은 성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라고 노래하니,
북풍은 : 북풍한설  매서운 추위의 칼바람을 뜻하는데 곧
   사람이 당하는 환란 풍파 실패 궁핍 고통 등을 뜻하고,
남풍은 : 남쪽에서 불어오는  따스하고  훈훈한  바람인데 곧
   평안 부요 건강 형통으로 모든 일들이 잘 되는 것을 뜻한다.
   많은 사람들이 북풍이 올 때는 두렵고 떨며 주저앉고
   남풍이 오면 긴장도 풀리고 신앙도 해이해져 타락을 한다.
   그러나 참 성도는 오히려, "북풍이든 남풍이든 오라!!"하며
자기 자신의 영적 신앙의 가꾸어진 실력으로 남풍과 북풍을
다 이겨내고 오히려 향기를 멀리 멀리 날린다.
   중심에 구속한 주님 한 분 모시고 (16절)
주님으로 더불어 교제하며 즐겁고 만족한 삶을 살아 나간다

 
 2009. 3. 15.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의 길을 안다.
 
         제   목 :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의 길을 안다
        성경말씀: 잠언 14 : 8 ~ 12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의 길을 알고
     자기의 길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길이란 무엇인가?
     어떤 지점에서 어떤 지점까지를 연결해 주는 과정이다.
     따라서 인생의 삶 자체가 길이며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인생이 다 길을 가고 있는데, 길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이 아니고 좋은 길이 있고 나쁜 길이 있다.
     악한 길이 있고 선한 길이 있으며, 진리의 길이 있고 비진리의
     길이 있으며, 의로운 길이 있고 불의한 길이 있다.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인생 길,
     그렇기에 후회가 없도록 현재 현실의 길을 잘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좋은 길과 나쁜 길을 분별을 해야 한다.
        우리가 시장에 가서 하찮은 물건 하나를 사도 비교하여
     좋은 것을 사려 하거늘, 하물며 우리 인생길에서 어떤 길이
     좋은 길이고 어떤 것이 나쁜 길인가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구분하고 분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다.
     사람의 사상이나 이념과 철학은 그 기준이 될 수가 없다.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각자가 생각과 철학이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사건과 사물과 세상 돌아가는 이치와
     사람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근거하여 살펴봐야 한다.
        하나님 말씀에 맞으면 무조건 좋은 것이고 의로운 것이며
     깨끗한 것이고 영광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안 맞으면 그것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나쁜 것이고 악한 것이고 더러운 것이다.
        우리의 삶과 주위 환경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표준으로 하여 살펴보아야 한다.

     둘째, 좋은 길과 나쁜 길의 결국을 알아야 한다.
        좋은 길, 의로운 길,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성경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삶의 길, 이 길의 결국은 어떤 것인가?
        모든 죄를 사함 받으며, 죄 값으로 죽었던 영혼이 거듭 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이다.
        나쁜 길, 불의한 길, 하나님을 부인하고 배척하며
     불신의 길, 불순종의 길의 결국은?
     징벌과 저주가 있으며 훨~ 훨~ 타오르는 지옥 불바다에서
     영원토록 형벌을 당하는 것이다.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며
     믿음의 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의 길을 걸어가면,
     육신의 삶을 사는 이 세상에서도 아름다운 것으로 풍부함을
     누리게 되지만, 불신의 길,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나쁜
     길을 걸으면, 현실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험악한 세상 고통스럽고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구약에서 축복받은 위대한 인물 "욥"은
     자기의 길을 알고 그 결국을 아는 사람이었다.
     동방의 큰 자요 몇 천 억이 되는 갑부였지만, 한 날에
     그 많은 재산이 다 망하고, 일곱 아들 세 딸이 형제의 생일
     잔치를 하다가 태풍으로 집이 무너져 한 시에 다 죽었다.
     자신은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병들었고
     주위 모든 사람이 다 욥을 비웃고 조롱했다. 하지만, 욥은
       "나의 가는 길을 그(주님)가 아시나니  (욥23:10)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아오리라"
     비록 육신적 외부적으로는 비참하리만큼 망한 것 같았지만
     자신이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순종하는 좋은 길에 서 있기에
     자기의 길과 그 결국은 정금같이 되어 더 많은 큰 축복을
     받을 것이라 믿고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고 믿은 그대로
     구약시대에 의인의 칭호를 받으며 더 많은 축복을 받았다.

     셋째, 자신의 길을 살펴 좋은 길을 가야 한다.
        좋은 길과 나쁜 길을 분별하고 그 결국까지 살폈다면
     이제 자신은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가정에서도 자신의 언행심사를 살펴서 좋은 길인가?
     나쁜 길인가?  직장이나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이 걷는
     길, 하는 일이들이 과연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하나님 말씀에 합당한 축복받을 일인가를 살펴야 한다.
     하나님 말씀에 합당하다면 힘을 내어 더 잘해 나가서 축복을
     받고, 말씀에 합당치 못하다면 원통히 여기며 회개하고 바로
     서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자기의 길을 아는 것이 된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가는 길도 모르고
     그 길의 결국도 모르면서 그저 길을 가기만 하고 있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우리 길의 결국은 천국복락이요
     영생이기 때문에 현재 삶의 길을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순종의 길을 걸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최대 축복이 된다.
 
 
 2009. 3. 8. 하나님은 정상적인 과정으로 축복 하신다
 

 제     목 : 하나님은 정상적인 과정으로 축복 하신다.
성경말씀 : 창세기 17 : 15 ~ 19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결혼한 30 여년이 되었으나 딸이든 아들이든
자녀를 출산치 못했다.   이 시점에서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의
제일 되는 소원은 자식을 낳아 후계를 이어가는 것이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2 : 2절에서
"아브라함이 큰 민족을 이루고 창대케 되리라" 축복하셨으며
13:16절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많을 것"을
다시 축복하여 주셨다.
   세월은 흘러 아브라함의 나이 어언 80여세로
자녀를 출산할 기능은 점점 쇠퇴해 지고 하는 수 없이
"엘리에셀"이란 사람을 양자로 들여 후계를 이어가려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5 : 4절에서
"엘리에셀이 아니고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고
말씀하셨고, 이 후로도 세월은 또 4~5년이 흘렀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자신이 아이를 잉태치 못하는 것을 스스로 죄스럽게 여겨,
자기 몸종 "하갈"을 남편에게 주어 아들을 얻으려 했고
아브라함도 좋게 여겨 하갈을 첩으로 취하여 아들을 낳아서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였다.
   첩에게서 낳은 아들 "이스마엘"을 볼 때에 아브라함은
살맛이 나고 소망이 생겼다.
"아하!  이젠 나도 후사를 이을 아들이 있다.
  첩을 취해서라도 아들을 낳은 것이 백번 잘 한 일이다.
  참 잘한 일이야! 하며 스스로 위로를 받고 살았다.

   그런데 어인 일인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은 네 후사가 아니다. 본부인 "사라"에게서 낳을
 자가 네 후사가 될 것이다." 고 말씀하시며 양자였던
"엘리에셀"이나 첩에게서 낳은 아들 "이스마엘"을 인정하지
않으셨다.
   즉,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의 별 같이 땅의 티끌 같이
번성하고 창대하도록 축복하시는데,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얻은
양자나 첩에게서 낳은 자식으로 축복하시는 것이 아니고
합법적으로 결혼한 본부인 "사라"를 통하여 정상적인 과정을
거쳐서 축복하시겠다고 확실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과연 그러하시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을 축복하심에 있어
불법이나 비정상적인 과정으로 축복하시는 것이 아니고
지극히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과정을 밟아 축복하시는 것이다.

첫째, 자녀들을 축복하심에도 정상적인 과정으로 축복하신다.
   아브라함의 예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가정과 자녀들을 축복하시는데
부적절한 관계나 비정상적인 과정이 아닌 합법적으로 결혼한
정상적인 부부의 관계를 통한 자녀와 후손들을 축복하신다.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가 인간의 꾀를 써서 첩을 통한 아들
이스마엘을 얻기는 했지만 그때부터 그 가정에는 불화와 분쟁이
일어났고  4,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 분쟁이 중동지역에
계속되어 차라리 아니 얻은 것만 못하게 된 것이다.

둘째, 재물의 부를 얻음에도 정상적인 과정으로 축복하신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말씀은 곧 재물의 부를
얻음에도 땀 흘려 수고하여 얻어야 하고 그런 합당한 과정과
진행을 통하여 축복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메시지이며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라는
말씀도, 국가에 낼 세금도 내고 하나님께 드릴 예물도 드리는
정상적인 재물관리를 통해서 축복하신다는 뜻이다.
   도박이나 사기를 치고 도둑질을 해서도 어느 정도는
잘 될 수 있지만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은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차라리 아니 얻은 것만 못한 것이 된다.
   엿새 동안은 힘써 일하고 주일은 거룩하게 지키며 편히 쉬는
지극히 정상적인 활동을 통하여 물질의 축복도 주신다.

셋째, 건강을 누림에도 정상적인 과정으로 축복하신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잠언 3:1~2,  4:20~22)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통하여 건강도 누리게 하시고 장수하게도 하신다.
성경에 금한 음식은 먹지 말고(술, 담배, 마약, 피, 우상제물등)
말씀에 합당한 활동과 음식 섭취를 통하여 영,육간에 평안과
건강과 장수의 복을 주시는 것이다.

넷째, 지혜를 얻음에도 정상적인 과정으로 축복하신다.
   "하나님의 경외함이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다"하셨고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어리석은 자로 지혜롭게 하고 지혜자로
하여금 더 지혜롭게 축복을 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부귀영화를 누리며 세상 것을 얻기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뛰는데, 우리는 항상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정상적인 과정을 통하여 축복하신다.
 
 2009. 3. 1. 네 나중이 처음 것보다 많도다
 

제     목 : 네 나중이 처음 것보다 많도다
성경말씀 : 요한계시록 2 : 18 ~ 23 

   두아디라 교회,
두아디라 교회는 지금의 터키 중서부에 위치한
"두아디라" 도시에 있는 교회이다.  사도 바울의 전도로
세워 졌고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자주장사 루디아가 바로
이곳 두아디라 도시 출신이다.

   두아디라 교회에 계시된 예수님의 모습은
불꽃 같은 눈으로,  사람의 마음과 천상천하의 모든 비밀을
꿰뚫어 보시는 전지전능하신 주님으로 나타나셨고,
주석같이 빛난 발로, 천하의 모든 것을 발로 밟고 굴복시키며
심판하시는 주님으로 나타나셨다.

   두아디라 교회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신 주님께서는
"네 나중이 처음 것보다 많다"고 잘한 것을 칭찬하셨다.
칭찬하신 것이 다섯 가지이니
첫째, 사업을 잘했다. 
   자선 사업, 선한 사업, 전도 사업등 교회와 사회에 유익을
   주는 일들을 많이 했다.
둘째, 사랑이 많았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와 교우들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많았다.
셋째, 믿음이 좋았다.
   성삼위 하나님만이 전지전능하신 참 신이라는 확신과
   성경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믿는 믿음이 좋았다.
넷째, 섬김이 많았다. 
   자신이 낮아져서 희생하고 수고하여 교회와 교우들을
   잘 섬기고 이웃을 배려하며 받드는 섬기은 일을 잘했다.
다섯째, 인내를 잘했다. 
   어려운 악 조건이나 고달프고 견디기 어려운 답답한
   상황에서도 잘 참고 견디어 냈다.

   이런 좋은 일들을 처음보다 점점 잘하고 발전시켜서
나중이 더 잘되고 나중이 더 많아지고 좋아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5년 전보다 오늘이 2년 전보다 현재가 아니 어제보다 오늘이
선한 사업과 사랑과 믿음이 더 많아지고 있는가?
어제보다 오늘, 섬김과 인내를 더 잘하고 있는가?

   우리도 자신을 살펴서
좋은 일들은 더욱 더 잘하여, 주님께로부터
처음 보다 네 나중이 더 많다는 칭찬을 받아야 할 것이다.

   두아디라 교회를
칭찬을 하신 주님은, 잘못에 대한 책망도 하셨으니,
첫째, 자칭 선지자 이세벨을 용납한 것을 책망하셨다.
   이세벨은 주전 800년 경 이스라엘 아합 왕의 부인이다.
이세벨은 시돈 나라의 공주인데 시돈은 이스라엘 북서쪽에
항구 도시로서 세계 각국과 무역을 하여 문물이 풍부하고
부흥했기 때문에 아합 왕이 시돈의 공주 이세벨과 정략적으로
결혼을 했다.  즉 시돈 나라와 이세벨이 바알과 아세라 등
잡신을 섬겼고, 이세벨이 왕후가 되면 이스라엘도 그 영향을
받아 잡신 우상을 숭배하는 일이 일어날 줄을 알면서도
경제적인 부를 위하여 이세벨과 결혼을 한 것이다.  결혼 후
과연 이세벨은 왕후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에다
수많은 잡신 우상을 만들어 섬겼고 대신들과 권력에 아부하는
백성들이 같이 우상을 숭배하여 이스라엘을 타락하게 하였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에도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두아디라는 마직, 모직, 피혁 등에 천연물감을 들여 파는
염색업이 발달되어 조합이 구성되어 있었고 두아디라 본토인
유력한 여자들이 주체가 되어 잡신을 섬기며 연중 한 번씩
"길드"라는 우상숭배 축제를 열었는데 두아디라 교회 교인들이
염색업에서 소외당하지 않으려고 유력한 여자 사제들을 따라
함께 우상을 숭배한 것이다.
   오늘날도 돈을 더 벌기 위해, 혹 사회적 승진과 출세를 위해
잘못된 권력에 아부하고 그들의 우상숭배에 참여한다면
이는 이세벨을 용납한 것이고 주님께 책망 받을 죄악이다.

둘째, 음행한 것을 책망하셨다.
   합법적으로 결혼한 이외의 남녀 이성문제는 다 음행이며
예수님께서는 남편과 아내 이외의 남자나 여자에게 음욕을
품은 것도 이미 간음죄를 지은 것이라 지적하셨다.

셋째, 우상숭배 제물을 먹은 것을 책망하셨다.
   성삼위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이든 신으로 인정하고 섬겨
음식을 차려 먹는 것은 다 이 죄에 해당한다.

   우리가 잘한 것이 있지만 또한 잘못한 것은 없는지 살펴서
말씀에 합당하게 잘 한 것은 더욱 더 잘해 나가 축복을 받고
잘못한 것은 예수님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여 끊고 회개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선하신 뜻을 잘 이루어 드려야 한다.

 
 2009. 2. 22. 웃시야 왕이 강성해진 원인
 
    목 : 웃시야 왕이 강성해진 원인
성경말씀 : 역대하 26 : 12 ~ 15

   웃시야 왕은 유대나라의 제 13대 왕으로
16세에 왕이 되어 52년간이나 왕으로 권세 영광을 누렸고
유대나라를 부국강성한 나라로 우뚝 세운 훌륭한 왕이다.
   16세 어린 나이로 왕이 되어 50여년이나 권세 영광을
누리고, 유다나라를 부국 강성하게 세운 원인은 무엇일까?

   먼저 웃시야 왕국의 부국 강성함의 규모를 살펴보자.
1)전쟁마다 승승장구 했다. (6~8절)
   팔레스타인 여러 성읍들을 정복하고 그 가운데 웃시야
왕국의 성읍을 건축했으며, 아라비아 족속과 마온 족속과의
싸움에서도 대승을 거두고, 암몬 족속에게서는 싸움도 없이
항복을 받고 조공을 받아 그 이름을 널리 떨치게 되었다.

2) 목축과 농업을 부흥시켰다. (9~11절)
   중요한 곳마다 망대를 세워 파수를 견고히 하여 백성들의
삶을 안전케 했고, 물웅덩이를 많이 파서 목축을 부흥시켰으며,
또한 산을 개간하고 좋은 밭을 만들어 곡물을 풍성케 하고,
포도원에 관리하는 자를 두어 산물이 풍부케 하였다.
무엇보다도 식량이 귀중한 때에 곡물을 풍부케 한 것이다.

3) 막강한 군사를 보유하였다. (11~13절)
   족장의 우두머리로 장군 급 큰 용사들이 2천 6백 명이나
되고 건장하고 싸움에 능한 용사 정예병이 30만 7천 5백이나
되었으며 이들이 다 웃시야 왕을 돕고 따르는 자들이었다.
   불과 2백여 년 전, 조선 말기에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10만 정병을 양성하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이를 무시하여서
전란의 화를 당한 우리인데,  웃시야 왕국의 31만 정예병은
지금부터 2천 7백 년 전이니  정말 그 시대에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4) 좋은 무기를 개발하고 비축하였다. (14~15절)
   좋은 방패, 창, 투구, 갑옷, 활과 물매 돌을 많이 비축하고
기술자들로 새로운 무기를 창작하여 요소마다 설치했으니
이런 강성함이 원근 각지에 퍼졌고 이렇게 강성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기이하신 도우심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별 능력도 없이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웃시야,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신기한 능력으로 도우셨는가?  그 이유는
첫째,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다. (4절)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것은,
천상천하에 하나님만이 전지전능하신 참 신임을 믿고
만물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생명의 주님으로 섬기며
항상 그 믿음 가운데 살았다는 뜻이다.
   당시에 주위 여러 나라 족속들은
바알, 아세라를 비롯하여 여러 잡신과 미신을 숭배했지만
웃시야는 오직 성삼위 하나님만을 참 신으로 믿고 섬겼으니
이것은 곧 사실 그대로를 인정하고 믿은 정직한 행위였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신으로 인정하는 것은 거짓된 것이며
하나님이 아니라도 구원을 얻고 영생을 누릴 수 있다고 하면
이런 것은 다 정직하지 못한 속이는 행위이다.
   또한 잘못한 죄가 있는데도 그것을 감추고 덮고 나가면
이 역시 거짓된 것이며 정직하지 못한 행위이다.
   정직이란, 잘못한 죄를 잘못한 것이라 솔직히 시인하고
하나님께 사죄의 은총을 구하여 깨끗하게 용서 받는 것이다.

둘째, 스가랴 선지자의 가르침을 받고 순종했다. (5절)
   스가랴는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알고 바르게 가르치는
참 선지자였다.  웃시야는 왕이라는 최고 지위에 있으면서도
스가랴 선지자가 가르쳐주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 그대로 순종하고 실천했다.
   웃시야가 하나님을 구(求)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시고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다 밝히셨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구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구한 것이며,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찾고 말씀에 명령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한 것이다.
   웃시야가 왕이면서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고,  이렇게
하나님을 구하고 말씀의 인도와 주장을 받아 순종하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고,  이를 기뻐하신 하나님께서는
만능으로 웃시야를 도우셔서 16세 소년에 왕이 된 웃시야가
전쟁마다 승리하고 부국 강성함에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웃시야가 노년에
자기의 부흥 강성한 것에 스스로 교만해져서, 자기 맘대로 하여
하나님께 범죄 하므로,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문둥병이 들어
별궁에 갇혔고, 얼마 후에는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우리는 이를 교훈삼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며
말씀의 가르침과 인도를 받아 끝까지 순종하여야 하겠다.

 
 2009. 2. 15. 더 신사적인 베뢰아 사람
 
제      목 : 더 신사적인 베뢰아 사람
성경말씀 : 사도행전 17 : 10 ~12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로 가서 복음을 전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도 퍽 신사적이었는데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더 신사적이었다.

   신사(gentleman)의 원조는 영국이다.
영국 사람들이 신사라는 말에 얼마나 자부심과 긍지를 가졌는지
한 예로, 영국은 그 당시 국회의원들이 기사도 정신이 있어
칼을 차고 국회 회의에도 참여를 했는데 여,야 양당이
가운데 통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앉아서 회의를 하다가
정책 대립으로 감정이 격화되면 서로 칼을 뽑아서 겨누기도
했다.  그런데 그 때 사회자가
"신사 숙녀 여러분!! 진정 하십시오" 라고 한 마디만 하면
칼을 뽑아 겨누던 사람들이 칼을 집에 넣고 다시 자리에 앉아
회의를 진행했다고 한다.  즉 신사 숙녀라는 말에 그만큼
자부심가지고 신사로서 자신들을 가다듬고 자랑스럽게 세워
나간 것이다.  본문에서 "신사적"이란 말은
헬라 원어 유게네스인데 영어로는 "gentle"(젠틀)
보다 더 품격이 높은 "noble character"(노블 캐릭터) 라고
기록해서 신사보다 더 귀족적이요 훌륭하다고 표현을 했다.
  물론 본문 말씀의 뜻은 세상적인 신사를 뜻함이 아니고
신앙적으로 "믿음의 신사"  "귀족적인 신앙"을 뜻한다.

   더 신사적인 베뢰아 사람들은?
첫째,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11절)
   어떤 일이든지 간절함이 없으면 별 유익이 없다.
간절함이란 열심과 정성 사모함이 포함된 것이기 때문이다.
 학생이 공부를 해도 이 간절함이 없으면 시간만 보내는
것이지 공부한 것이 자기의 실력으로 만들어지기가 어렵고
세일즈를 해도 간절함이 없으면 실적을 올릴 수가 없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에 있어서도 예배드리러 올 때부터
간절한 마음으로 와야 하며, 찬송을 하든지 기도를 하든지
열심과 정성과 사모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예배가 될 수 없고,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아 누릴 수가 없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받음에 있어서도 간절한 마음으로
듣고 받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들은 그 말씀이 결코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며
우리 생명을 살리는 영의 양식이 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시편 107:9)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간절한 마음으로 열심과
정성과 사모하는 마음으로 받는 것이 품격 높은 신앙이며
곧 신사적이며 귀족적인 신앙인 것이다.

둘째,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읽고 살폈다.(11절)
   제아무리 사도가 전한 말씀이라 하여도 이미 기록된
성경말씀과 일치가 되는지 날마다 성경말씀을 읽고 살펴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아무리 훌륭하고 유명한 목사라
하여도 이때의 사도 바울과 비교하면 사도들에 반의 반절도
못 되는 그런 수준이다.
   그럼에도 TV나 대중을 등에 업은 이름 있는 유명한 목사가
말하면 그의 말이 성경에 합당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믿고
따르는 잘못된 풍조가 한국 기독교 사회에 만연해 있다.
  이제 우리는 베뢰아 사람들처럼 그 누가 말씀을 전해도
성경말씀에 합당한가를 살펴서 합당한 것은 아멘으로 화답하고
받을지언정 합당치 않은 것은 배척하고 멀리해야 한다.

셋째, 믿었다.(12절)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그러한가 하여 성경을 살펴서
성경말씀에 일치가 되고 합당할 때는 이제는 믿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말씀을 지식적으로는 많이 알고 있는데
전혀 오류가 없는 정확무오하게 이루어질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믿지를 않고 있다.  아무리 간절하게 말씀을 받고 성경을
열 번 이상 읽고 살폈어도 자신이 믿지 않으면 아무 유익이
없고 오히려 주님께 죄를 지을 뿐이다.
믿어야 구원이 있고, 믿어야 복이 있으며, 믿어야 신사적이다.

넷째, 순종하고 실천했다.(12절)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면 또한 실천해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고 말씀하셨다.(약2:26)
창세 이래로 일어난 하나님의 모든 축복의 역사는 믿고 순종할
때 일어났다.
   믿으면서도 순종치 않는 것은 비신사적이다.
신사란, 믿고 있는 좋은 것들을 실천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비신사적인 요소는 없는지 살펴보자.
그래서 우리도 신사적이며 귀족적이고 품격 높은 신앙인으로
거듭나야 한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축복해 주신다.

 2009. 2. 8. 인본주의의 발생
 
제     목 : 인본주의의 발생
성경말씀 : 창세기 11 : 1 ~ 9 

   노아시대 홍수로 천하 모든 것이 다 수장(水葬) 되고
노아 여덟 식구만 구원을 받아 이들이 번성하면서 사방으로
퍼져 살다가 시날 평지 드넓은 곳에 정착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말하기를
"자, 우리가 벽돌을 구워 역청을 발라 성과 대를 쌓아
하늘에 닿게 하고 우리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 하며
벽돌을 만들어 성과 대를 쌓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하나님의 뜻을 외면한 인본주의(人本主義)로 죄악에 속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언어가 혼잡케 되어 온 지면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인본주의란,
사람을 근본으로 하고, 사람이 중심이 되어, 사람을 위한,
사람의  뜻을 펼치는 것으로, 얼핏 생각하면
아주 좋은 사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람을 망하게 하는
심히 잘못된 사상이다.

   사람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따라서 사람은,
사람 자신들을 중심할 것이 아니고
창조주 되시며 모든 인생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을 중심하고
성삼위 하나님을 근본으로 하여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하나님을 위하는 삶을 사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이다.
"이 백성은 내가(하나님)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이사야 43:21)

   우리가 손수 만들기도 하고 돈을 주고 사서 소유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  생필품 가재도구를 비롯하여 승용차나
휴대폰 또는 애완동물까지, 그러면 우리가 소유하는 그것들이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존재 하는가?
그것들 자신을 위해서 존재 하는가?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우리의 모든 소유물은 오직 주인 되는 사람을 위해서 존재
한다.  만약 우리의 소유물 중에 우리를 위하는 것이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버릴 수밖에 없다.  그런 것처럼 천하 만물과
인생들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시날 평지에서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의 인본주의 사상은?
첫째, 성과 대를 쌓아 하늘에 닿게 하자. (4절)
   여기서 하늘이란 창공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신 하늘을 뜻하는 것으로 곧 하나님의 영역에
도전하며 도발하는 교만하고 악한 행위이다.
   이 시대 사람들은 노아의 후손들로
하나님께서 40주야 비를 내려 온 천하를 물로 심판하신 것을
구전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시날 평지에서 생활해 보니
편리하고 좋은 면들이 있으나 만약에 또 홍수 심판이 있다면
이 평지에서 어떻게 살아날까 하는 염려와 궁리 끝에, 그래,
성과 대를 쌓아 하늘에 까지 닿게 하면 제아무리 비가와도
하나님의 심판을 이겨내고 살아날 수 있겠다 하는 인간 생각
곧 인본주의에서 시작이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온 세상을 물로는 심판하지 않겠다"
무지개를 증거로 하여 약속을 하셨는데, 바벨탑을 쌓는 것은
하나님의 이런 언약을 믿지 않은 불신앙과 거역하는 행위요
또한 노아 홍수 심판은 괜히 일어난 것이 아니고
그 시대 사람들의 행위가 항상 악하여 온 세상에 죄악이 가득
하므로 그 죄에 대한 심판이었던 것으로, 사람이 죄를 안 짓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될 것을, 그런 좋은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들 하고 싶은대로 온갖 죄를 다 짓고, 어리석게도 감히
하나님의 심판을 이겨내 보려는 인본주의였던 것이다.

둘째, 우리 이름을 내자. (4절)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셨거늘 (고전10:31)
자기들이 명예 영광을 얻고 자기 이름을 나타내고자 한 이것이
곧 죄악이며 하나님의 뜻을 무시한 인본주의 사상이다.

셋째,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4절)
   분열이 없이 하나가 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인본주의로 하나가 되어 흩어짐을
막자는 것은 다 같이 망하는 것으로 차라리 분열되는 것이 더
좋은 것이다.  오늘날 가정이나 사회 또는 교회에서도
하나가 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하나가 되느냐,
이것이 문제이다.  만약 바벨탑을 쌓은 시대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거역하고 범죄하며 인본주의로 하나가 되는 것이라면
차라리, 하나님 영광을 위하고 하나님 뜻을 따르기 위하여
분열되는 것이 훨씬 더 좋다.  왜냐?  그것이 생명길이요
영원한 축복의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본주의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의 신본주의로 살아야 한다. 
 
 2009. 2. 1. 스스로 개척하라
 
제     목 : 스스로 개척하라.
성경말씀 : 여호수아 17 : 14 ~ 18

   본문의 역사적 배경은
지금부터 3,400년 전 여호수아 시대의 말씀이다.
충성 된 종 모세를 통하여 만능의 역사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하나님께서 마침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로 인도하셨다.

   이스라엘 12지파별로 가나안 땅을 분배하는데
이미 그곳에는 원주민인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이 살고 있었고
가나안 족속은 강대하며 당시 최고 무기인 철병거를 갖췄고
이스라엘 백성은 군대 훈련도 제대로 못 받고 무기도 변변한
것이 없어서 군사(軍士)면에서 훨씬 열세에 놓여 있었다.

   이때 요셉지파가 총 지도자인 여호수아에게 항의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셔서 큰 민족을 이루었는데
우리 지파에게 한 몫의 땅만 주시는 것은 어째서 입니까?"
여호수아가 "그래 너희 지파는 번성을 해서 그 땅이
좁을 것이니 브리스, 르바임 사람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요셉지파가 다시 말한다.  "브리스,  르바임 산지(山地)는
좁고 그 아래 평지에는 철병거를 가진 가나안 족속이 살고
있어서 우리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여호수아가 "그래, 산지라 험하고 그 아래는 철병거를 가진
강한 족속이 있어도 네가 개척하라 너희 것이 될 것이다"
이렇게 명하니, 이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것이었다.
요셉지파는 수가 많아서 자기들의 삶의 터전이 비좁고
부족한 줄을 알면서도 그것을 자기들이 넓히려고 힘쓰기보다
편히 앉아서, 누가 해주기를 거저 받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
"힘들고 어려워도 너희가 스스로 개척하라" 말씀하셨다.

   과연 오늘날도 그러하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 부족하고 모자란 것이 있을 때에
누가 거저 해주기를 바라지 말고, 수고 없는 대박을 바라지
말고, 힘들고 어려워도 "스스로 개척하라"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개척해야 하는가?
첫째, 우리 마음 밭을 개척해야 한다.
   자연 상태로 버려져 있는 땅은 황무지로서
잡초와  가시덤불 돌들이 어우러져 있어
좋은 과일이나 좋은 알곡들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렇듯, 사람 마음을 본능적 마음 그대로 방임하고 놔두면
부패한 성질 그대로 죄를 짓고 온갖 더럽고 추한 일에 휩싸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일들을 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먼저 우리 마음 밭을 개척해야 한다.
마가 7장 21절에 "사람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기 등이니"  이런 것이
내 마음 속에 있다면 이것이 잡초며 가시덤불이며 돌들이다.
황무지를 개척하듯 우리 맘속에 있는 악하고 추한 것들을
캐내버리고 끊고 회개하여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지는 이것이
곧 우리 마음을 개척하는 것이며 우리가 이일을 힘써야 한다.

둘째, 믿음의 영역을 개척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로서 빛과 소금의 역할과
맡은 직분에 따라 주어진 일을 감당해야 할 사명들이 있다.
목사, 장로, 집사, 권사, 권찰, 찬양대, 주일학교교사, 구역장,
각 부서장, 남, 여 각 전도회 임원진, 등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 있음에도 하지 못하고 미적거리고 있는 부분들,
이것들을 찾아 개척하고 감당해애 한다.
   이름만 목사,  이름만 장로, 이름만 권사,  집사, 교사가 아닌
이름만 찬양대원, 이름만 구역장이 아닌 실질적으로 그 이름과
직분에 합당한 일들을 찾아 개척하고 이루어 나가야 한다.
  교회에 모든 직분은 하나님을 섬기며, 성도들을 섬기며,
이웃을 섬기는 "섬기는 직"이다.  자칫 교회의  어떤 직분을
명예직이나 권세직으로 알고 있다면 이는 큰 오산이며 착각이다.
   하지 못하고 있는 섬기는 일들을 개척하여 넓혀 나가자!

셋째, 세상일들을 개척하고 이루어 나가야 한다.
  우리는 천국 시민권을 가진 하늘의 백성이면서도
현실적으로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각 분야에 종사하며 맡은 일들을 넉넉히 감당하여
어디서나 존귀하게 쓰임을 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뒤로 밀리고 뒤떨어져 있는 미진한 부분들,
이런 것들을 찾아 힘써 개척하고 이루어 나가야 한다.
   직장이나 학교, 개인 사업 사업이나 가정의 일, 그 어떤 일이든지
올바른 범위 내에서 분투노력하여 뛰어난 길을 가야 한다.

  우리의 삶에 부족하고 아쉽고 후회스런 일들을
누가 거저 해 주기를 바라거나 또는 포기하려 하지 말라!
스스로 개척해 나갈 때에 우리 하나님께서도 도와주신다!

 
 2009. 1. 25. 곤란 중에 너그럽게 베푸신 하나님

제    목 : 곤란 중에 너그럽게 베푸신 하나님
성경말씀 : 시 편  4 : 1 ~ 8

   시편 4편 본문 말씀은
다윗이 계시를 받아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자신의 삶을 통해서 체험하고 확증한 말씀이다.

   우리의 한 평생에는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진퇴양난의 곤란하고 험한 일을 당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자기만 곤란한 일을 당한다고
생각하고 괴로워하는데 사실은 이런 곤란한 일을 누구나 다
당하고 있으며, 믿음으로 훌륭하게 성공한 선진들도,
오히려 우리 보다 더 크고 많은 곤란한 일을 당하면서
그 중에서 믿음 키우고 자격을 만들어 승리한 것을 우리가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가 있으며,
다윗도 그 중에 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체험을 통한 말씀을 받아서
곤란 중에 너그럽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다.

   본문 말씀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세 가지로 나타냈으니,
첫째, 하나님을 의(義)의 하나님으로 믿었다. (1절)
   의의 하나님, 하나님은 공명정대(公明正大)하신 분이며
옳고 바른 분이며 무엇이든 행한 대로 가감 없이 정확하게
살피고 갚으시며 그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 믿었다.
그렇기에 그 하나님 앞에서는 원망 불평이 없고 오직 믿고
의지하고 따르면 되는 것이었다.
둘째, 곤란 중에 너그럽게 베푸시는 하나님으로 믿었다. (1절)
   진퇴양난의 곤란한 일을 당한다.
이것은 질병일수도 있고 사업의 실패 실직 또는 궁핍과 가난
위험한 사건과 사고 자녀 문제 부부 문제 갈등과 고민 등,
우리 삶의 전반적인 문제를 다 포함하고 있다.
   과연 그때에 우리를 그 곤란한 중에서 건져주실 분,
문제를 해결하고 너그럽게 도우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심을
믿었다.  사람은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이 곤란한 일을 당했
어도 능력이 없어서 돕지 못할 때가 너무 많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에 그 어떤 곤란한 일에서도
너그럽게 베푸실 사랑과 능력이 있음을 믿은 것이다.
셋째, 선대하시는 하나님으로 믿었다.
   사람들이 비웃는다.
"네가 곤란한 일을 당했는데 너를 선하게 도울 자가 누구냐?
없지!  있으면 말해봐,  넌 그렇게 거꾸러지고 말거야!"
그러나 다윗은 온 세상 것들이 다 자기를 버리고 등 돌려도
오직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선하게 대해 주실 줄 믿고
기도하였다.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춰주소서"
   오늘날도 과연 그러하다.  곤란 중에 우리를 선하게
대우해 주실 분은 그 누구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본문에 나타난 다윗의 신앙생활 네 가지,
첫째,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2절)
   다윗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한다고
책망하며 그것은 헛된 일이며 궤휼이라 지적을 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려 드리는 자기의 신앙생활을
뜻한 것이다.
   과연 그렇다!  성삼위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이라도
신으로 인정하거나 숭배하거나 제사를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천지 만물의 창조주도 하나님이시며,
만물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지옥 불에서 천국복락을 누리게 하심도 하나님이시다.
   그렇기에 모든 영광은 오직 우리 하나님께만 바쳐야 한다.
둘째, 경건한 생활을 했다.(3절)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라" 이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을 위하여
경건한 삶을 살았다는 뜻이다.  경건이란 세상의 타락된 문화
풍습 전통 미신적인 흐름에 물들지 않고 믿음을 지킨 것이다.
셋째, 떨며 범죄 하지 않았다.(4절)
   "떨며"는 분 내어 라는 뜻이 있다.   왜 분 내어 범죄 하는가?
자기 뜻대로 안되니까 분 내고 감정을 폭발시켜 죄짓는 것이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해지기 전에 분을 풀라"(엡4:26)
넷째, 의의 제사를 드렸다.(5절)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의 제사,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
하여 상한 심령으로 회개하는 제사를 드렸다.(시51:17, 마22:43)
   사이비와 이단들은 "구약시대는 율법을 지켜서 구원 받았고
신약시대에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 받았으며, 지금은 성령의
은사를 받아서 구원 받는다고 하면서 미혹을 한다.
   그러나  창세 이래로 주님 재림 때까지 그 누구이든
오직 예수님의 대속의 은총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

   이런 믿음의 삶을 살았기에, 다윗은 곤란할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 했고, 하나님께서는 너그러이 베풀어 주셨다.
   오늘날 우리들도 다윗 같은 믿음으로 살기만 하면
어떤 곤란한 중에도 너그럽게 베풀어 주신다.
 
 
 
 2009. 1. 18.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
 

제     목 :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
성경말씀 : 데살로니가전서 5 : 19 ~24

   우리는 해가 거듭될수록
영, 육간에 아름답게 자라나고 가다듬어져야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우리에게는 축복이 되기 때문이다.

   본문 21절에서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
하셨으니, 우리가 사는 날 동안 붙들고 이루어 나가야할
존귀하고 소중한 말씀이다.
   우리들의 삶을 살펴보면
당한 형편에 따라서 느끼는 대로 거침없이 말하기도 하고,
마음 먹히는 대로 좋지 않은 마음을 품기도 하고,
하고 싶은 대로 절제 없이 행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무슨 말을 하든지, 무슨 마음을 품든지, 어떤 행동을 할 때에
모든 일을 헤아려 보아서 그중에 가장 좋은 것이 어떤 것인가?
좋은 것은 취하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셨다.
   본문에 "좋은 것"의 어원은 헬라어 칼로스 인데
"좋은" "아름다운" "선한" "마땅한" "올바른" 이란 뜻으로
성경 말씀 여러 곳에 사용되었다.
   이 "좋은" 것을 구체적으로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이며 또한 말씀에 속한 모든 것들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다 좋고 아름다운 것이며
선하고 마땅하며 올바른 것으로 완전무결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 마음과 감정의 충동대로 할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말과 마음과 행동을 헤아리고 살피고 가다듬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말, 하나님 말씀에 합당한 마음,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 합당한 행동을 하여 성도로서 마땅히
좋고, 아름답고, 바르고, 선한 것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
   또한 하나님 말씀에 합당치 못한 것들은 그 어떤 것이든지
더럽고, 악하고, 죄 된 것 인줄 알고, 배척하고 나가야 한다.
   이렇게 좋은 것을 취하고 악한 것은 버려 나가므로
우리는 점점 거룩해지고 아름다운 성도로 변화되어 가는데
이것이 생각처럼 쉽게  되는 일이 아니다.
   힘쓰고 애써 봐도 쉽지 않은 일이니,
우리에게는 자신만을 위하고자 하는 이기심과 자존심이 있고
세상에 대한 욕심과 부패한 성질이 숨어 있어서
   이런 것들이
좋은 것을 취하고 악한 것을 버리고자 하는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좋은 것을 취하고 악한 것을 버리려면
우리의 노력과 힘으로만은 온전하게 이룰 수가 없기에
첫째, 성령을 소멸(消滅)치 말라.(19절)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성도들에게는 이미 성령님이 임하여
계신다.   사실은 성령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임하셨기에
(성령세례)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된 것이다. (고전 12:3, 3:16)
또한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성령님이 함께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깨달음도 주시고 확신도 주시고
위로와 소망과 기쁨과 평안과 죄를 회개하고 끊어버리게 하는
마음에 느낌과 결단력과 감동을 주시는데
이것을 "성령님의 은혜"  "성령님의 역사"라고 하며
이렇게 베풀어 주신 성령님의 은혜와 역사를 잃어버리지 말고
보존하고 계속하여 유지해 나가므로 성령님의 인도와 주장을
받아 좋은 것을 취하고 악한 것을 버릴 수가 있다.

둘째, 예언을 멸시치 말라. (20절)
   예언은 되어 질 일들을 미리 말한 것으로
하나님 말씀인 성경 뜻한다. 성경 말씀만이 말씀한 그대로
완전무결하게 100% 다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계 1: 3)
   그렇기에 성경 신,구약 66권 말씀은 그 어떤 말씀이든지
존귀하게 여겨 믿고 받들어 나가야지, 행여나 소홀이 여기거나
가볍게 여겨 무시하면 절대로 안 된다.
   읽고 듣고 받은 성경 말씀은 보배로운 생명 양식으로,
마음에 품고 믿고 받들고 순종해 나가면,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어서 죄악을 물리치고 좋은 것을 취하도록 역사를 하신다.

셋째,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을 버리라. (21절)
   이것은 사람 쪽에서 곧 우리 자신이 분투노력해야 할 일이다.
어떤 일이든지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좋게 말할 수 있으며
좋게 행동할 수가 있고,  한편으로는 나쁘게 보고 부정적으로
말하고 불순한 행동으로 악하게 대처할 수가 있다.
이때 성령님이 베푸신 은혜와 성경 말씀을  붙들고 자기 자신의
언행심사를 살펴서 좋은 것을 찾아 취사선택해 나가야 한다.

   이렇게 하고자 분투노력하면 (23~24절)
평강의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친히 우리를 거룩하게 도우시고
우리를 부르신 주님께서도 우리가 이룰 수 있도록 도우셔서
우리는 거룩한 천국백성으로 변화되어 축복을 누리게 된다.


2009. 1. 11. 큰 자는 자신과 이웃을 깨끗케 한다.
 

 제    목 : 큰 자는 자신과 이웃을 깨끗케 한다.
 성경말씀 : 요한복음 13 : 3 ~ 15 

   하나님께서 크게 여기시는 사람은
자신을 깨끗케 하고 이웃을 깨끗하게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자신을 더럽히고 이웃을 더럽히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 받을 자이며 멸망 받을 자이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고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차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베드로의 앞에 서셨다.
   베드로가 "주께서 내 발을 씻기겠습니까?  안 됩니다."
"주여 내 발을 절대로 씻을 수 없습니다" 하고 만류하니,
예수님께서는 "내가 네 발을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대답하셨다.
베드로가 "주여 그렇다면 손과 머리까지 씻겨 주소서" 하니
주님께서는 "이미 목욕한 자는 온 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되느니라"하시며 베드로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러하신 행위를
단순히 발을 씻겨주고 섬기는 세족의식 정도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은
깊은 진리와 생명의 뜻 예수님의 사랑이 숨겨져 있다.

   예수님과 베드로는 이미
선생과 수제자로서 주님과 사도로서 밀접하게 맺어져 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기지 아니하면 아무 상관이 없다
하신 것은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행하심이 이미 맺어진
주님과 제자의 관계까지도 부정할만한 중요하고도 중요한
뜻이 있음을 암시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  또한  "많은 사람의 죄에 대한 속죄
제물로 자신을 주기 위함이다"라고 하셨다.
즉 예수님은 베드로의 죄까지도 깨끗하게 사하려 오셨다.
그러므로 "발을 씻기지 않으면 아무 상관이 없다"는 뜻은
만약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기지 아니 하신다면
베드로의 죄는 죄 그대로 그냥 남아있고,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베드로와 아무 관계가 없게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행위는
단순히 섬김의 본을 보이신 것이나, 세족의식을 넘어서서
베드로의 죄를 씻겨서 깨끗케 하는 사죄의 은총을 베푸심과
생명을 살려 나가는 구원의 역사임을 분명하게 밝히신 것이다.

   "이미 목욕한 자는 온 몸이 깨끗하다"는 뜻은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로 처음 믿고
회개했을 때,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원죄와 출생해서 죽을
때까지 저지르는 모든 죄를 단번에 용서하셔서 천국 백성
하나님 자녀로 삼으신 구원의 은총을 뜻한다.
   이것을 "기본 믿음"  "기본 회개"   "기본 구원" 이라 하며
이것은 단 한번으로 영원토록 변치 않고 그 효력이 발생한다.
   이런 구원의 은혜로
천국 백성이 되고 사도가 되었음이 확실함에도,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언행 심사 간에 여전히
잘못할 때가 있다.   이  때,
일상의 활동 속에 더러워진 발을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듯,
평소 생활에서 지은 죄들을, 그때마다 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믿는 믿음의 회개를 하면 주님께서 깨끗하게 사해 주시겠다는
뜻으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것이다.
이는 발이 더러워졌을 때마다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는 것처럼,
우리가 잘못했을 때마다 반복적으로 거듭 회개해서 사함을
받는 것이기에 "중복 회개"   또는 "건설 구원" 이라고도 한다.

   이제 우리가 금년 한해 깨끗하게 되어야
하나님께서 높이 보아 주시고 축복해 주시는데 그 비결은,
첫째, 예수님을 구주(救主)로 믿어야 한다. (목욕하는 것)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야
   하고 이미 믿는 사람은 믿음에 확신을 더해야 한다.
둘째, 하나님 말씀을 순종해야 한다.  (벧전 1 : 22)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니 말씀을 배운대로 순종해야 한다.
셋째, 평소 생활에서 잘못하는 것은 그때마다 바로 회개해서
   즉시로 사함을 받아야 한다. (발을 씻는 것, 중복회개)
   발이 더러워졌을 때마다 씻어서 깨끗하게 하는 것처럼.
넷째, 서로 발을 씻어줘야 한다. 사람들끼리의 잘못을 서로가
   용서해 주어야 한다. (본문 14 ~ 15)
   주님은 자신께서 본을 보이시고 우리도 따르라 하신다.
주님을 따라가면 우리가 점점 깨끗해지고 다른 사람을 깨끗케
함에 도움을 주어, 성삼위 하나님께서 기뻐하고 좋아하시며
우리를 크게 보시어 축복해 주신다.

 
 2009. 1. 4. 섬기는 자가 크게 된다.
 
제     목 : 섬기는 자가 크게 된다.
성경말씀 : 마태복음 20 : 25 ~ 28

   2009년 새해는 밝았지만
세계적인 경제 위기로 우리나라 국내적으로도 힘들고
우리들 삶의 현실에서도 여러 어려움이 현실로 느껴지고 있다.

   어렵고 힘든 이 시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성공적으로 한 해를 보낼 수 있을까?
작년 하반기부터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갈구했다.
   감동시켜 주신 말씀이 오늘 말씀이니,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은
야고보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나아와 하는 말이
"예수님! 주의 나라에서 내 두 아들을 하나는 오른 편에
 하나는 왼 편에 세워 권세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하니
 열 제자가 듣고 분이 나서 다투며 시기할 때였다.
"애들아, 세상 사람들이 권세를 잡고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고
 다른 사람들을 마음대로 부려먹으며 좌지우지하고 있지?
 그러나 너희들은 그렇게 하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면 종이 되어라"
이렇게 말씀하시며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서 크고 잘 되는 비결을 말씀해 주셨다.

   경제적 위기의 금년 한 해,
돈도 잘 안 벌리고, 물가는 오르고, 직장에서도 어렵고,
사람들 사이도 갈등이 일고 가정에서도 움츠러들기 쉽다.
   그렇다 해도 우리는 영, 육간에 성장을 해야 하며
금년을 보람 있고 성공적인 한 해로 장식을 해야 하는데
   그 비결은
주께서 말씀하신대로 섬기는 사람이 되고 종이 되는 것이다.

   섬기는 사람, 종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첫째, 나를 낮추고 상대를 높이 보는 것이다.
   사람 사이에 불화가 싹트고 분쟁이 일어나는 큰 원인은
서로 높아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가정에서도 부부끼리 서로 높아지려고 자존심을 세우다가
다투기도 하고 상처를 받으며, 직장이나 사회생활에서도 서로
높아지려고 하다가 불화와 반목이 일어난다.
   교회의 각 부서나 모임에서도
자존심을 세우고 고집을 부리며 자기가 높아지려다가
갈등이 생기고 불편한 일이 생긴다.
   이제 우리는 이런 육신의 부패한 성품의 요구와
이 세상 불신앙 자들의 삶의 형태를 벗어나서,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주위 사람들을 높게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먼저 낮아져서 우리를 섬기셨고
또한 우리가 주님을 본받아 살기를 소원하시기 때문이다.
   부부 사이도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 보고, 교회에서나
직장, 사회생활에서도 나를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실력이나 갖춘 것이 주위 사람들보다
월등히 뛰어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주위를 얕보면 안 된다.
   우리 주 예수님처럼 자기의 뛰어난 지혜와 능력으로
오히려 주위 사람들을 섬기며 자신을 겸손히 낮추는 것이다.

둘째, 내 뜻대로 하지 않고 상대의 마음을 받아주는 것이다.
   섬기는 사람, 종은, 자기 뜻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는다.
상대의 뜻 상대의 마음을 받아주고 품어서 받들어 나간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자기 뜻을 행하려 오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오셨고 그리 행하시다 가셨다.
   우리도 자신의 뜻대로 하려 말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인 성경말씀대로 해야 하며,
가정과 교회와 사회생활에서 상대의 뜻과 내 뜻이 충돌할 때,
   죄가 되지 않는 이상, 큰 손해가 나지 않는 이상,
살며시 내 뜻을 접고 상대의 뜻을 존중해 받들어 나가야 한다.
   이것이 섬기는 삶이고 하나님께 높임 받는 비결이다.

셋째, 내가 수고 희생하여 상대의 영이 잘 되게 하는 것이다.
   내가 낮아져서 상대를 섬기며 수고 희생 하는 것은
주목적이 상대의 영혼을 잘되게 함에 있다.  내가 수고하고
희생하므로 하나님 사랑을 모르던 사람이 하나님 사랑을 알고,
내가 봉사하고 섬김으로 예수님을 모르던 사람이 예수님의
구원의 은총을 알고, 내가 낮아져 섬기므로 상대의 영혼이
잘되고 진리에 선다면, 이것은 곧 섬김의 열매요 상급이 된다.

   2009년 올 해가 비록 경제적 위기이고 어렵다 해도
겸손하게 나 자신을 낮추고 주위를 섬기어 받들어 나가면
우리 주위가 한층 밝아지고 우리 주위 사람들이 좋아할 것이며
예수님을 본받아 예수님의 뜻을 순종한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며 우리를 영, 육간에 높여 주신다.
   돈을 많이 못 벌고 출세 승진 못했어도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는 삶이라면 이것은 진정 축복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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